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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 눈을 뜨니 새벽 2시 반이었다. 전날 있었던 일이 믿어지지 않았나 보다. 수첩에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17~18km를 걸었으니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해도 여한이 없다고 써 있다. 론세스바예스를 지나서 하나를 더 걸어가 보겠다는 야심찬 계획과 함께. 결론적으로 말해, 발카를로스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 12km 남짓 걷고 완전히 기진맥진했다. 한겨울에 피레네를 넘은 나폴레옹에 대한 무한 존경심이 솟아나던 날이었다.

 

처음에는 옆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 아스팔트 도로를 걸었다. 길에는 차도,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가다 보니 '큰 개조심'으로 추정되는 표지판이 있었다. 전날에도 개들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터라 살짝 긴장되었다. 조금 더 걸었더니 도로 옆으로 내려가는 흙길이 있었는데, 까미노 표지판은 그쪽을 가르키고 있었다.

 

그 후 한참을 눈쌓인 산을 올랐다. 외국의 인적 없는 산길을 혼자 걷는 건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했다. 어느 갈림길에서는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살펴도 화살표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올 것이 왔다. 사자만한 개가 길 한가운데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 놈은, 가끔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하면서 도비켜주지를 않았다. 보기엔 순해 보였지만 옆을 스쳐 지나가기엔 너무 컸다. 한쪽은 비탈진 산길이고 한쪽은 절벽이라 스스로 길을 내 줄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발자국 하나가 내 손바닥보다 컸던 그 개는, 올 테면 와 보라는 자세로 언제까지나 버틸 듯이 앉아 있더니 30분이 지나서야 어슬렁거리면서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개한테 관찰 당하는 듯한 묘한 느낌이란.

 

눈쌓인 산길을 오른지 얼마나 됐을까. 눈앞에 너른 언덕이 보였다. 표지판에는 론세스바예스까지는 15분만 가면 된다고 써 있었는데, 한참을 가도 마을이 나오지 않았다. 

 

2시 조금 넘어서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했다. 이 곳은, 프랑스길을 스페인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어렵게 찾아간 알베르게는 문이 잠겨 있었다. 3년 전에는 론세스바예스에 알베르게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근처 식당에 가서 '메뉴 델 디아'라는 것을 처음으로 주문해서 먹었다. '오늘의 메뉴' 라는 뜻으로, 10~15유로 정도면 식사(스테이크나 파스타)와 와인을 먹고 마실 수 있다.

 

되도록 천천히 밥을 먹고 나서 세시가 좀 넘어서 알베르게에 갔더니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다. 이건 뭐.. 전날 잤던 곳은 거의 5성급 수준이었다. '호스피탈레로'라고 불리워지는 알베르게 종사자는 젊은 여자였는데, 무뚝뚝하기가 그지 없었다.

나는 그 날의 첫 손님이었다. 건물이 오래되었고 가구가 낡은 것은 상관 없는데, 침대가 2개씩 맞붙어 있었다. 낯선 사람이 바로 옆에서 자다가 몸부림쳐서 내 침대로 넘어올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샤워장은, 없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좁고 더러웠다. 그래도 샤워를 하고 나니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저녁이 되자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관광버스를 타고 왔는지, 배낭을 멘 순례자들이 한꺼번에 우루루 쏟아져 들어왔다. 어색함이 흐르는 가운데, 각자 간단히 통성명을 했다. 그 중에는 영어 이름이 애니인 한국 여성도 있었다. 덴마크에서 왔다는 크리스, 영국 사람인 수, 스페인 사람인 알렉스가 기억난다. 뒤이어 전날 SJPDP에서 만났던 크리스틴이 들어왔다. 눈 때문에 막혔다는 피레네 산맥을 제대로 넘어 왔다고 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도 시도나 한번 해볼 걸 싶었다.

몇몇이 같이 나가서 저녁을 먹었다. 사람들이 미사에 참석한다길래 나도 쭈뼛거리면서 따라나섰다. 성당은 알베르게 근처에 있었다. 신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못알아 들었지만, 진지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좋았다. 사람들이 줄지어 앞으로 나가길래 '아, 뭐 받아 먹는 그건가 보다' 하면서 나도 따라나갔다. 미사 시간에 제대로 앉아 있어 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는데, 참석한 사람은 누구나 다 무언가를 받아 먹는 건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말 없이 사람들에게 차례차례 그것(성체라고 하는 것)을 나눠주던 신부는 내 차례가 되자 내 눈을 바라보면서 영어로 물었다. "Are you catholic?" 못알아 듣는 척 할 수 없는 단어들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No, but I want to." 라고 대답했다. 신부는, 내게 주려고 내밀었던 것을 거둬들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No." 라고. 그게 뭐라고.. 좀 치사하고 더러웠지만 신부의 자세가 너무 강경했기 때문에 더 개기지 않고 깨끗이 물러났다. 

미사는 길었다. 중간중간 멍때리면서 사람들이 하는 대로 앉았다 섰다 하고 있는데, 미사를 집전하던 신부가 갑자기 어눌한 발음으로 '너와 함께' 라고 말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함께 있어 주겠단다. 내가 모르는 그가. 그가 모르는 내 옆에. 왜 그 먼 곳까지 흘러 가게 되었는지 아무 상관 없이.

새벽 2시 반부터 깨 있던 터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숙소로 돌아와서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어제는 모임이 너무 늦게 끝났다. 전날 조금씩 마신 술에 나도 모르게 몸이 상했는지 오전 내내 침대 위에서 뒹굴거렸다. 오후에 공동체 모임에 갔다가 늦게 돌아왔다. 읽어야 할 것들이 산더미인데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은 없으니까. 오늘 못한 일은 아마도 내일 하거나, 아예 못하거나 하게 되겠지. 오늘 하루도 할 만큼 했다. 그만 자자.

Posted by 微物의 숨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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