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2일. 저녁부터 조금씩 내리던 빗줄기는 밤이 되자 더욱 굵어졌다. 스터디를 마치고 고어텍스 재킷을 입고 모자를 쓰고 방수 커버로 싼 배낭을 메고 걷다 보니, 정말 3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차림으로 길을 걸으면서, 3년 전의 오늘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 때는 회사 일에 매어 있었고, 지금은 내가 선택한 일정에 매어 있다. 그 때는 내가 아픈 것은 엄마 아빠 탓, 회사 탓, 헤어진 사람들 탓이었다고 생각했었고, 지금은 '내 탓이니 나만 제대로 하면 된다'고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매일 상처 받고 있는 나를 보는 것이 아프다.

 

 

 

어쨌거나.

 

팜플로나가 헤밍웨이의 소설에도 나오는 소 축제로 굉장히 유명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작년 가을이었다. 앞뒤 없이 화살표를 찾는 데 집중하느라 다른 정보를 얻고 누릴 여유가 없었다.

 

팜플로나의 숙소는 오래 됐지만 아늑했다. 다른 숙소와 달리 아침에 간단한 식사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출발 준비를 하고 마지막으로 신발끈을 단단히 매는데, 호스피탈레로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물었다. "are you ready to take off?" 나는 웃으면서 "yes, of course."라고 대답했다. 힘이 솟았다.

 

숙소를 나선 시간은 7시 30분. 그 날은 23.5km 떨어져 있는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까지 갈 계획이었다. 뒤늦게 머리핀을 숙소에 놓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꼭 필요한 것들'만 싼다고 쌌는데, 어깨가 빠질 지경으로 잔뜩 이고지고 있는 것들은 어쩌면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 있는 것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꼭 필요한 것들'은 세상에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진열대 위에 놓인 채 나를 유혹하는 그 많은 물건들은 도대체 뭘까?

 

 

 

혼자 걸을 때는 오래된 가요나 행진곡 풍의 민중가요를 부르거나 생각에 잠겼다. 개인사는 뒷전으로 팽개친 채로 까미노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야곱이 거기서 죽거나 말거나, 무덤이 거기 있거나 말거나, 화살표는 왜 만들어가지고 사람들을 걷게 하나..) 맥락 없이 한국 사람들의 집단 광기나 교육의 문제점 뭐 이런 것들을 생각했다.

 

 

 

같이 출발해도 다리가 짧고 걸음이 느린 나는 늘 뒤에 처진다. 앞에 간 사람들이 한참을 쉬고 막 다시 길을 떠날 때쯤 나는 지칠 대로 지쳐서 그들과 만나게 된다. 익숙한 무리에서 떨어져서 혼자 남겨지게 될까봐, 기를 쓰고 먼저 출발하고, 토하고 싶을 만큼 지쳐서 멈춰서고 싶을 때에도 걸음을 옮기게 된다. 마을을 지나칠 때마다 혹시 먼저 간 사람들이 그 곳 어딘가에 머무는 건 아닌지, 나는 계획한 장소까지 갔는데 혹여 사람들이 하나를 더 간 건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행복해 보이는 자리에 내가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싫어서, 내 처지를 잊고 안간힘을 다해 앞으로 내달렸다. 사람들과 같이 가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서 걷고 남들보다 오랜 시간 걷는 수밖에 없었다.   

 

 

 

 

 

 

길 한쪽에 순례자의 무덤이 있었다. 어디서 온 누구길래 길을 걷다 돌아가셨을까. 사진 속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뒤를 이어 길 위에 섰던 다른 수많은 순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잠시 묵념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가끔씩 순례자의 무덤을 만날 때마다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죽을 자리는 어디인가. 어디서 무엇을 하다 죽을 때 나는 가장 행복할 수 있을까.

 

 

 

 

걷다 보니 탁트인 녹지가 나왔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화살표를 따라 걸으면서, 설마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산을 넘어가는 건 아니겠지, 싶었는데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화살표는 산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발한발 힘겹게 걸음을 뗐다. 바람이 점점 세지고 있었다.

 

 

 

 

산 위에는 철제 구조물들이 서 있었다. 뭔가 이야기가 있을 법한데, 아무런 설명도 돼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산 정상 바로 아래, '미니 바'라고 써 붙인 SUV가 한 대 서 있었다.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웠기 때문에 주저 없이 커피를 사 마셨다. 

 

 

 

 

 

 

 

이 날도 주로 알렉스, 수와 함께 걸었다. 자갈길은 팍팍했다.

 

 

 

 

팜플로나와 푸엔테 라 레이나의 중간에 있는 마을인 시주르 미노르(cizur minor)에서 우테르가(uterga) 까지는 12km. 길가에는 마을도 바도 쉬어갈 나무 그늘도 없다. 먼지 날리는 메마른 길을 무작정 걸어야 한다.

 

 

 

 

걷다 보니 산티아고까지 747km가 남았다는 안내판이 보였다. 800km나 747km나. 생장피드포르에서 시작해서 한참을 걸은 것 같은데 별로 줄지 않았다. '과연 산티아고에 무사히 갈 수 있을까.. 그래, 크리스틴 말대로 그날 걸을 분량만 생각하자' 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겨울과 다름 없는 3월이라 포도밭은 황량했다. 푸른 잎이 무성할 여름에 보는 포도밭은 또 지금과 다른 느낌일 것이다. 

 

 

 

 

푸엔테 라 레냐의 알베르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10분 경이었다.

 

며칠 계속 2시를 전후해서 알베르게에 체크인 하게 된다. 그렇게 일찍 도착해서 나는 뭘 했더라? 마음에 드는 침대를 정하고, 순서를 기다려서 씻고 짐을 정리하면 오후 서너 시쯤 된다. 일기를 쓰거나 잡담을 하거나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대여섯 시쯤 저녁 식사를 한다. 7시쯤부터 다시 이곳 저곳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8시에서 9시 사이에 잠자리에 든다. 그날 처음 만난 순례자들끼리 간단한 인사를 하기도 하고, 그러다 죽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신나서 수다를 떨기도 한다. 좀더 걸으면 어떨까 생각도 하겠지만, 평소에 운동이라고는 돈을 주면서 등을 떠밀어도 안하던 사람이 매일 7시간 가까이 배낭을 멘 채로 걷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완주하기 전에 체력이 소진될까봐 비상 체력을 비축하느라 며칠간 술도 (거의) 안 마시던 참이었다.

 

 

 

 

짐을 풀고 쉬고 있는데 알렉스가 저녁을 사준다고 해서 같이 나갔다. 말이 안통해서 좀 답답하기는 했지만, 끔찍히 걱정하고 챙겨주는 고마운 분이다. 밥을 얻어먹은 게 미안해서 알베르게에 가서 알렉스의 발을 마사지해 주었다. 아빠한테 마지막으로 안마해 준 게 언제더라..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하지 않았던 게 생각 났다.

 

 

 

 

그날 밤 알베르게는 다른 때보다 훨씬 북적거렸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놀았고, 대화의 절반 정도를 겨우 알아 들을 수 있었던 나는 남들 웃을 때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일본 아저씨들 2명(토미오리와 토모리), 프랑스에서 온 알랑과 호세, 수잔, 요크, 키케, 로라노라, 엘렌, 디니를 새로 만났다. 론세스바예스에서 만났던 한국인 여성 애니를 이날 다시 만났고 계속 같이 걸은 수와 알렉스도 같은 숙소에 묵었다. 66년생인 엘렌은, 본의 아니게 내 인생을 크게 흔들어 놓은 네델란드 여자다. 물론, 그 때는 일이 그렇게 될 줄 둘다 몰랐다. 사실, 대부분의 크고 작은 선택들은 전혀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 온다. 계획-실행-평가가 관리 범위 안에 들어 있을 경우, 사람들은 '계획 대비 달성률'이라는 건조한 기준으로 예측의 정확도를 평가해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 내가 방금 한 재채기 때문에 한번 크게 흔들린 공기가 방을 빠져 나가서 어떤 사물과 어떻게 만나서 어떤 결과를 만들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걱정해 준 많은 사람들, 믿어주는 많은 사람들이 다 고맙고, 특히 알아서 잘 살아 주는 사람들이 고맙다는 말이 수첩에 써 있다. 나의 과도한 책임감과 완벽주의가 문제였다.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세상은 잘 굴러간다. 그때도,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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