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왜 이 곳에 왔는지 아무도 설명해줄 수 없지만 나는 조금은 안다. 저 각종 루즈와 립밤과 인공눈물과 뭉친 근육을 위한 크림과 리본 목걸이와 마무리용 파우더와 플라스틱 용기가 어디서 왔는지, 누가 무엇 때문에 가져다 놓았는지.

좀 오래 혼자 산 사람은 안다. 집에 있는 거의 모든 물건들의 역사를. 저기 저 빨간 통 왼편에 흐릿하게 보이는 것들까지도. 그리하여 그것들은 정해진 연이 다할 때까지 함께 있게 된다.

괴이하게도, 최근 세 달간 최소한 스무 번은 넘게 열어 보았을 서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낯선 통을 보았다, 방금.  

 

 

아래의 플라스틱 통.

아마도 예전의 나였다면 '아아 또 독일!' 하면서 밑도끝도 없이 주저앉았겠지만,

지금은 쇼를 해도 아무도 봐 주지 않으므로..는 농담이고  지금은 내성이 상당히 많이 생긴 관계로

혼자서 주섬주섬 사전에서 단어들의 뜻을 찾았다. 뭐, 대충 안약인 듯.

도대체 이 독일제 안약을 나의 삔&안쓰는 화장품을 넣는 서랍에 둔 이는 누구일까.

멩세코, 나도 Thilo도 아니라는 것.

 

누가 왜 넣어 놓았는지 모르지만 이것이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이유 없는 무덤은 없다. 심지어 제멋대로 부는 것 같은 바람에도 길이 있다.

(나는 "그냥"도 아주 중요한 이유로 쳐 준다.)

 

이것, BAUSCH&LOMB ARTELAC 말이지.  

어느 때인지 모를 그 때 아마도 '실 사용 후 적당한 곳에 보관해서 다시 쓰거나 다른 사람이 쓰게 하겠다'는 누군가의 의지로 서랍에 들어 앉게 되었다면

유효기간이 지난 지금은 몹시 심심해 하는 내게 생각할 거리를 주려고 잠자코 있다가 눈에 띄게 된 게 아닐까나.

뭐, 의지가 가상하여 나도 사진도 찍고 사전도 찾고 글도 올리는 공을 들였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리 착하게 살고, 아무리 모든 것을 논리정연하게 정리하고 살더라도 내가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저 형광에 가까운 초록 약통이 오랫동안 서랍 안에 자리잡고 있다가 지금 눈에 띈 것처럼. 물론 누군가가 무슨 이유에서 넣어 놓았겠지. 늘 그렇듯이 나만 모를 뿐인 거겠지. 내 집에 번연히 들어 있는 정체 불명의 물건의 역사를.

여튼.

현재의 지식/상식/정황 등으로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무엇이 언젠가는 닥칠 수 있다.

그 낯설고 새롭고 도저히 해석이 안되는 상황, 사건사고는 갑자기 이유 없이 온 것 같지만 나와 주변 상황이 함께 만든 수많은 이유들의 조합이다.

원래 편안했던 사람은 그저 편안하게 받아들일 뿐이고 원래 걱정이 많던 사람은 지레 걱정할 뿐인 우리의 '알 수 없는 미래'는 그래서 빈부격차/남녀차별/인종차별이 없다.

자만하지도 겁먹지도 비굴하지도 않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이 독일, 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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