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그 때 하루가 1년처럼 지나가더라니 하루를 기록하는 데 꼬박 1년이 걸리고 있다. 

그러니, 나는 제대로 하고 있다. 

미리 들춰본 6년 전의 4월 21일에 나는 참 행복했다. 이 추세라면 15년 뒤에야 기록되겠지만. 

지금은, 매달 한 통의 이별 편지를 쓰고 있다. 

 

사진을 보고 있자니, 당연한 말이지만 마을 이름과 풍경이 낯설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 여기, 여기선 이런 일이 있었지' 했었고, 알베르게의 화장실이며 침대가 놓여 있던 거며 다 기억 났었는데. 

 

2010년 4월 3일은 길을 걸은지 27일 되는 토요일이었다. 

길을 걷다가, 걸음이 빨라서 훨씬 더 멀리 갔을 것으로 생각했던 마르셸을 만났다. 

 

어쨌건. 

티로는 뒤에 남겨져 있고, 남은 길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내심 최선을 다해서 천천히 걸어가고 싶었는데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15km 쯤만 걷고 멈추고 싶었는데, 아무리 천천히, 아무리 놀면쉬면 걸어도 20km 이상은 계속 걷게 되었다. 

이 날은, 돌아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있다. 

"공부를 한다면? 여성학 사회학 철학 역사..." 등등의 리스트 아래에 주역, 불교가 있는 것이 흥미롭다. 

 

루이테랑의 알베르게에서는 직전 마을에 묵을 것으로 생각했던 엘렌과 디니 모녀를 만났다. 

걷는 동안 느낀 거지만, 누가 어디에 있을 거라는 예상은 늘 빗나간다. 

 

지금은 내가 거기를 대체 왜 갔는지 완전히 까먹었지만, 그때는 이렇게 써 있다. 

 

이제 알 것 같다. 여기까지 왜 왔는지. 

굳이 여기까지 와서 흔적을 남긴 성 야곱을 원망하면서 걷던 초반을 지나고 

뒤에 남겨지기 싫어서 30-40km씩 강행군을 하던 중반을 넘고 나니 지금은 오히려 걸음을 늦추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분홍신이 미쳐서 날뛰고 있다. 

지금 생각으로는, 그날 걸을 분량을 이미 다 걸었다면 단 한 발도 더 갈 수 없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춥고 피곤하고 지쳐서 막 알베르게에 도착했더니, 바로 다음 마을에서 예수가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절대 못 간다에 내 남은 온 시간을 걸 수 있다. 

 

이 때쯤 순례자들 물갈이가 있은 모양이다. 

동네 벽이나 표지판에 스페인 이름보다 영어식 이름이 더 많이 눈에 띄었다고 써 있다. 

진작부터 써온 친구들은 쓰다 지쳤거나 중간에 돌아갔을 것이고, 새로 온 아이들은 들뜬 마음에 계속 흔적을 남겼을 테지. 

 

이 날은 3시가 되기 전에 루이테랑에 도착했다. 

마르코를 만난 모양인데 사진 찍을 새도 없이 훌쩍 가버렸다고 한다. 마르코와 같이 걷던 로는 어디로 갔는지 묻지 못했다. 

같이 와서 끝까지 같이 가는 이들도 있고, 혼자 와서 같이 가는 이들도 있고, 같이 와서 혼자 가는 이도 있다. 

 

그날 있었던 일 몇 가지 기록하고 나서, 다시 '돌아가서 할일' 정리 모드다.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아서인 것 같다. 

여행 사진 정리해서 메일 보내기, 골라 놓은 책 읽기, 영어학원 등록하기, 회사에 가서 작별인사하기, 주역 공부하기, 생계 준비하기, 개인 명함 만들기, 회사 책상 정리하기. 

지금 보니 참 뿌듯하다. 책 읽기, 개인 명함 만들기 빼고는 거의 다 이루었도다.

 

당시 회사 사람들이 4월 14일에 밀라노로 출장을 간 모양이고.. 

1927년생으로, 순례길에서 2005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수첩에 적혀 있다. 

 

루이테랑의 알베르게는 전반적으로 유쾌했던 기억이다. 처음 만난 이들이 많았는데 계속 웃느라 배가 아팠다. 

이런 식이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항상 다음날 체크아웃 마감 시간을 묻는다. 아침에 짐 싸고 밥 먹는 시간을 알맞게 배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으면서 언제 나가면 되냐고 물었더니 주인장 둘 중 하나가 대답했다. as soon as possible.

내가 막 웃으니까 다른 주인이 9시라고 알려 주었다. 

처음에 대답했던 주인이 정색을 하고, "오늘 9시야. 나가." 뭐 이런. 

 

이날, Andre, 그리고 피네스테레까지 동행한 Jean Pierre를 새로 만난 건가? 

여튼, 일별로 날짜를 계산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이 날부터였던 것 같다. 

남은 날들을 쭉 적고, 그 밑에 예상되는 목적지를 적어 놓는 식이다. 매일 아무리 정교하게 계산해도 매일 예상을 빗나가는, 하나마나한 취미 생활, '계획 짜기'. 

 

하도 오랜만이라 표지판 한번 올려 봤다. 어인 일인지 순서가 자기들 마음대로 뒤죽박죽이 됐다. 하늘의 뜻인 걸로. 

이날의 하늘도 하루에 만번쯤 변했다. 것도 뭐, 한 6년 있으니 다시 변화에 무감해지기는 하더라만. 

 

디니, 그리고 엘렌. 잘 가던 티로를 엘렌이 붙잡지만 않았어도. 책임을 물을 수도, 그렇다고 고맙다 말할 수도 없다. 

 

여기가 어딘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딱히 슬프지는 않다. 좋은 기억이 사라진 것처럼 나쁜 기억들도 사라졌을 것이므로. 

 

예쁜 동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겠다. 

 

 

슬슬 지겨워지는 호리병.

 

사진이 뒤죽박죽이 되다니. 무슨 조화일까. 

 

방명록에 저 따위로 글을 써 놓다니. 좀더 결정적이고 감동적으로 쓸 수 없었냐 말이다. 

 

4.3 항쟁이 일어난 날이로군요. 

날이 갈수록 산티아고로 가는 발걸음을 늦추고 싶습니다. 

꼭 죽을 날 받아 놓은 것 같아요. --;

그렇지만 뭐, 길은 길일 뿐이니까요. 

그간 널어 놓은 것들 하나씩 주워 담고, 버릴 건 버리면서 끝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27일간 무사고로 여기까지 온 것, 걱정해주고 염려해주는 많은 분들 덕인 것 압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many thanks for praying for me. 

 

이 때만 해도 다치지 않고 걸을 수만 있어도 뜨겁게 감사하고 행복해 했구나. 이 때만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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