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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1일 수요일, 아스토르가(astorga)에서 라바날 델 까미노(rabanal del camino)까지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22.7km를 걷고 하루를 마감했다. 아스토르가의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몇몇 순례자들이 사람들 소식을 전해 왔다. 우리가 레온을 지날 때쯤 순례자들 사이에 설사병이 돌았다고 했다. 마실 수 있다고 써 있는 길가 샘물을 마신 사람들이 줄줄이 탈이 났다는 소식이었다. 문제가 생긴 사람들 이름 중에는 진과 마르코도 있었다. 티로 소식은 수정에게 들을 수 있었다. 어디선가 동행을 했는데 아시아 여자를 보면 말을 걸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아마도 그는 "네 짝은 동양 여자다"는 계시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한참 지나서 들은 거지만, "미친 동양 여자를 거두는 게 자기 운명"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기는 하다.

 

이 날 일은 별로 기억나는 게 없다. 그때는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머리 속은 온통 티로 생각 뿐이었다. 사진을 봐도 6시간 동안 구름 한점 없이 맑았다가 흐렸다가 다시 맑았다가 하면서 하늘이 버라이어티 쇼를 했던 것만 있다. 수첩을 보니 흠. 좀 흥미로운 게 있군.

이 날은 24일차였는데, 수첩에는 "길 위에서 마치 23년을 산 것 같다."고 써 있다. 하루가 1년처럼 길었다는 뜻도 되지만, 1년에 한번, 아니 평생에 한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일들이 단 하루 만에, 것도 거의 매일, 일어나는 곳이었다, 그 곳은. 사방이 뻥 뚫린 곳에서 하루를 보내다 보면 별별 해괴한 경험을 하거나 보게 된다. 그리고는 알게 된다. 단 하루, 24시간 동안 모든 것이 일어나고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다는 것을.

까미노가 끝나고 나면 예전의 자기와는 전혀 다른 자기를 만나게 될 거라는 말을 누군가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저 계산법에 따르면, 30세에 시작해서 35일을 걷고 나면 길 끝에 65세의 노인이 서 있는 식이니, 그럴 법도 하다.

 

수첩에는 또

*생계 유지

*가치 있는 일

이라고 써 있다. 나름 2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한 터라, 먹고 사는 문제가 엄청 걱정이 되긴 됐었나 보다. 아빠는, 마흔 두 살이 되던 해에,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바로 그 해에 꽤 오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은연 중에도 나는 아빠보다는 오래 회사를 다녀야 할 것 같았었다. 2010년에 나는 마흔 셋이었다.

 

라바날의 알베르게에서는 아마도 페드로와 플로리안을 만난 것 같다. 그들의 이름 밑에 "얼마나 더 걸어야 보고 싶은 사람을 우연히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라고 써 있다. 나는 나만 보는 내 수첩에다가도 "티로가 보고 싶다"라고 쓰지 않았다. 그냥, 소식을 들을 수 없어서 걱정 된다고, 어디 있는지 궁금하다고 쓴 게 다다.

 

조금씩 기억이 나기 시작한다. 저녁에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들으러 성당에 갔었는데, 아마도 그 날은 성가를 부르지 않는 날인 것 같았다. 미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는데 노래 비슷한 건 한 마디도 못 들었다. 아마도 엉뚱한 성당을 갔거나, 아마도 날이 정해져 있거나 했겠지. 성당 밖으로 나갔을 때는 그냥 맞기에는 좀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순례자들은 성당 처마 밑에 오종종 모여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티로와 헤어진 지 나흘째가 되자 별별 생각-이 자식이 나를 일부러 피하는 게 틀림 없다, 설사병이 났나 따위-이 다 들었던 나는  마음이 울적해져서 쏟아지는 비를 그냥 맞으면서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날은 아마도 크루즈 데 페로에 가는 날인 것 같다. 수첩에 무엇을 묻어야 할까 하고 묻고 있다.

 

아래 사진들은 6시간 동안 펼쳐진 라이브 구름 쇼와 기타. 길바닥이 뭘로 만들어졌는지, 비가 와도 질척거리지 않고 해가 나면 또 금방 말랐던 것 같다.

 

 

전날은 그냥 구경만 하고 지나갔었는데, 이 날은 화살표 아랫부분을 조금 손질(아니 발질)해 주고 갔던 기억이 난다.

 

 

 

 

 

 

 

 

 

 

Posted by 微物의 숨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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