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일 토요일은 비가 부슬부슬 왔다. 아타푸에르카(atapuerca)에서 부르고스(burgos)까지는 21.4km만(!) 걸으면 됐기 때문에 홀가분했다. 8시가 다 돼서 숙소를 나왔다.

 

초반 열흘을 같이 걸었던 다른 순례자들을 하루에 단 한 번도 못 만난지 꽤 된 것 같아서 헤아려 보니 고작 2-3일이었다. 지나온 날도 앞으로 올 날도 아득하기만 한 시간들이었다. 헤어진 사람들 중 몇이나 다시 볼 수 있을까?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한 인사가 마지막이었을까?

 

이 날은 티로와 같이 걷다가 중간에 진을 만났다. 죽 이어진 공장들 옆길을 따라 아스팔트를 계속 걸었다. 그 곳의 공기는 다른 곳과는 달리 매캐했다.

 

아타푸에르카에서 다시 우의를 두고 나왔다. 자기가 미안해할 일도 아닌데, 티로는 못챙겨서 미안하다고 했다. 이제 어쩐다, 하고 있는데 -왜냐면 이 날은 비가 왔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진이 "저 비옷 두 개 있어요." 라며 배낭에서 하나를 꺼내 주었다. 왜 우의를 두 개 가져 왔냐고 물으니 예비용으로 하나 더 가져 왔단다. 고마운 한편 기가 막혔다. 다들 10g이라도 줄여보려고 매일같이 아둥바둥 하는 판에 유일하게 하나 더 챙겨 가지고 지금까지 이고지고 온 게 마침 내가 그 순간 절실하게 필요했던 거라니. 그렇게 어렵게 가지고 온 걸 나를 줘도 괜찮겠냐고 물으니 "이러려고 가져왔나봐요."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티로는 음식을 시킬 때 꼭 내게 먼저 고르라고 했다. "아무 거나." 아니면 "같은 걸로."라고 말하는 데 익숙해 있던 나로서는 매번 곤혹스러운 시간이었다. 머뭇거리고 있으면 내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하라고 했고, 결정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는 그 음식에 맞는 다른 음식을 주문해서 같이 나누어 먹었다.

 

식사를 할 때 티로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서두르지 않았다. 배가 터질 때까지 먹어도 1인분을 다 못 먹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은 만큼 실컷 먹고 나면, 그제서야 속도를 냈다. 3박 4일째 동행하면서 배려심이 남다른 티로에게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진은 둘이 걸어야 하는데 자기가 끼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다른 감정이 전혀 없기도 했고, 영어로 듣고 말하는 데 지치기도 했던 나는 진을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부르고스는 컸다. 아마도 지금까지 본 도시 중 제일 크고 오래된 도시 같았다. 지금까지 시골길 흙길 산길 옆 작은 마을만 봐 왔던 지라, 부르고스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인구 1000만의 거대 도시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아래 사진은 시내로 들어가는 입구.

 

성당이 빨리 문을 닫는다고 했던가? 숙소에 체크인하기 전에 성당을 먼저 들르기로 했다. 아래는 성당 주변. 

 

 

성당 안은 크고 화려했다. 그림과 조각들을 보며 뭔가를 깊이 생각하던 티로는 많은 말을 해 주었다. "look! you know what?" 으로 시작하는 설명의 대부분은, 안타깝게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뭐는 뭐를 상징하고, 그래서 색은 저 색을 썼고.. 뭐 등등의 말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다.  

 

그리고 광장에 서서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고 있는 색감이 굉장히 좋다고 했다. 각각 다른 시대에 다른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잘 어울린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칭 아티스트라 그런가 보다. 나는 그냥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다.

 

 

부르고스의 알베르게에 체크인한 시간은 5시였다. 알베르게는 넓고 깨끗하고 쾌적했다. 파티션을 설치해서 독립성을 확보해 주려 하였으나, 그 곳은 이미 발빠른 인간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의 침대는 바로..

 

 

 그 파티션들의 제일 끝 변방. 나와 진은 각자 1층칸을 차지했고, 티로는 파티션 안쪽의 2층칸에 짐을 풀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 보는 화장실 앞 침대는 좀 생뚱맞았다. 침대와 바닥에 놓인 노란색 비닐은, 진이 가지고 와서 하나씩 나눈, 그 문제적 우의.

 

벽쪽에 대여섯 개 죽 늘어서 있는 샤워장 앞에서 티로는 한참 서성거렸다. 빨리 안 들어가고 뭐하냐는 내 질문에 가장 좋은 곳을 고르는 중이란다. 제일 깨끗한 곳, 제일 물이 잘 나오는 곳, 제일 물이 잘 빠지는 곳 등등을 점검하고 있는 그에게 "너는 전형적인 서양인이 아니라더니 전형적인 독일인이로구나." 라고 했더니 그냥 웃었다.

 

밤에 잠을 자는데 누군가가 침대 옆을 지나가다가 잠시, -1, 2초간- 멈춰 서서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티로였다. 그는, 오빠가 여동생한테 장난을 치는 것처럼 내 머리를 스스슥 헝클어트리더니 화장실로 갔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3월 20일은 내게 여러 모로 의미 있는 날이다. 친구의 생일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내가 기억하는 이유는 오래전 그날 있었던 다른 일 때문이다. 2013년 3월 20일은 생활 운동 단체 일로 좀 바빴다.

 

밀린 숙제가 줄어들지 않는다. 오늘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여기서 끝날 수도 있고 더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루 한 걸음이면 충분하다. 나라도 나를 압박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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