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25일 목요일은 내 인생에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 중 하나다. 이날, 나는 벼락을 맞은 거나 다름 없다. 그 날 이후, 이전의 나는 죽고 완전히 새로운 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잘 된 일인지 잘못 된 일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남은 인생을 통틀어서 이 날 하루와 바꾸자고 해도 바꿀 수 있을 만큼 이 날의 경험은 찬란했다.

 

전날 나와 티로는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의 술집이 문을 닫는다고 나가 달라고 할 때까지 시시덕거리면서 놀았다온 우주가 협동해서 자기를 물 먹이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지금껏 꿋꿋이 살아남았다며, 그건 다 IQ 141의 뛰어난 지능 때문이라고 티로는 뻐겼다. 나는 나대로, 나를 만난 자는 누구나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만큼 매력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 똑똑하고 잘난 너마저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고나 또한 만 3세가 되기 전에 한글을 깨쳤으며공인 IQ는 비록 110이지만 문제를 풀다 풀다 재미가 없어서 중간에 포기한 결과 그렇게 된 거라고 되지도 않은 말들을 주워 섬기면서 떠들어댔다.

언젠가 세상에 나가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겠다는 티로의 말을 듣고는 목청이 찢어질 만큼 크게 웃으면서 "야 이 덜 떨어진 인간아. 구원하는 사람 수가 뭐가 중요하냐. 한 명이라도 제대로 구원해라. , 바로 너 말이야." 하고 말했고, 그 말을 듣은 티로도 다시 크게 웃었다

한동안 우리는 둘다 너무 extremely smart 하고 우리는 너무 extremely funny 하며우리는 너무 extremely loving giving 하다며 자화자찬에 열을 올리다가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똑똑해도 너무 똑똑한 나머지 이 지경에 이르렀다며, "Homo extreme sapiens"라는 신조어를 함께 만들었다.

그날 밤, 까미노의 절반 가량을 걸어 온 우리는 스스로에게 대만족해서 흥분이 극도에 이른 것이었다

 

다음날 숙소를 나선 시간은 오후 1시로 기록돼 있다. 알베르게는 그렇게 늦게까지 있을 수 없다. 아침 9, 아무리 늦잠을 자도 아무리 아파도 10시에는 체크아웃을 해야 한다.(알베르게는 1박만 가능하다.) 정황상 호스텔에서 잔 게 분명하다. 이틀 간의 외도로 우리는 사실상 몹시도 친밀해졌지만, 딱 그만큼의 긴장감으로 분위기는 무거웠다거기서 더 친해지면남은 날을 떨어져서 보내는 것이 힘들어질 거라는 것을 Homo extreme sapiens인 우리는 둘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며칠간 계속 하루에도 몇번씩 날씨가 변덕을 부렸다이날 길을 나설 때도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는 455km. 하루에 20km씩 걸으면 22일 남짓, 25km씩 걸으면 18일 남짓이 걸리게 된다남은 거리와 예상 소요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한 건 정확히 이 날부터였다.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불고 있었기 때문에 티로는 방풍과 보온을 위해 우비를 입고 앞서 갔다. 이날 우리는 다음 마을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 따로 걸었다둘이 같이 걷다가 안면 있는 순례자들을 만나면 뭔가 눈치챌 것 같은 생각이 은연 중에 피어 올라서 우리는 둘다 그 생각에 감염되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걷는 속도를 달리 했다....

 

일단 여기까지. 명색이 M.M인데 성목요일에는 나가서 만찬장에 있어 줘야지기회 되면 다시 잇기로 한다. 지금 시간은 2013 3 28일 저녁 7 20.

 

 

2013 3 29일 아침 8, 이어쓰기.

이 날 우리는 1시부터 7시까지 6시간 동안 17km를 걸었다유난히 날씨 변화가 많았던 날이다. 쨍하게 맑았다가 금방 비가 왔다가, 다시 쨍하게 맑았다가 비가 퍼붓기를 수 차례. 여러 사진에서 보다시피, 까미노는 10km 이상 덜렁 길만 이어지고 집도 가게도 비 피하는 곳도 없는 허허벌판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폭우가 쏟아진다고 그만 걷거나 비를 피했다가 다시 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아침에는 무조건 알베르게에서 나와야 했고, 일단 길 위에 올라 서면 기어가든 굴러가든 다음 마을까지는 가야만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몇 시간 동안 차도 사람도 만날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좀전까지 비가 왔다가 금방 다시 맑게 갠 하늘 아래로 곧게 뻗은 흙길을 천천히 가고 있을 때였다. 서남쪽 하늘에서 어마어마하게 크고 시커먼 먹구름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내가 있는 쪽으로 달려 들고 있었다. 실생활에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세상이 끝나는 날 악마의 군단이 검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땅으로 무자비한 속도로 치고 내려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전히 눈부시게 파랗기만 하던 나머지 하늘 90%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심상치 않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봐 왔던 수많은 먹구름 중에 그렇게 시커먼 건 정말로 처음이었다. 오던 길을 뒤로 돌아 전속력으로 달려도 비구름을 피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길 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내 머리 위에 먼저 도착한 구름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하늘의 나머지 반은 여전히 파란 상태였다. 굵고 거센 비는 너무 아팠다.

그건 시작이었다. 양동이에 가득 든 물을 쏟아 내는 건 저리 가라였다. 하늘 전체가 소방 호스가 된 것처럼 하늘은 엄청난 양의 비를 무시무시한 힘으로 뿜어냈다. 눈을 뜰 수도 없을 만큼 비가 퍼부어대는 바람에 나는 걷기를 포기하고 길 위에 멈춰 섰다 10분 만에 파랗던 하늘 전체가 먹구름에 점령 당했다주변의 풀과 나무모든 것들은 비바람에 흔들리고 쓰러지면서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나도 무서워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20분쯤 됐을 때가 절정이었던 것 같다온몸이 덜덜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히기 시작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 뭐 이런 생각을 하며 서 있었는데, 다른 건 다 지나가도 이 비는 기세로 보아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 같았다언제까지 이렇게 하염 없이 온몸으로 이 비를 맞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길 위에 선 후 한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무력감이 격하게 올라왔다. 무섭고 떨렸다. 이대로 꼼짝 없이 여기서 죽나 싶었을 때, 빗줄기가 아주 조금 약해진 것이 느껴졌다. 실눈을 뜨고 하늘을 살폈다서남쪽 하늘 끝자락 너머로 하늘색이 손톱 조각만큼 올라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먹구름은 덮칠 때와 같은 빠른 속도로 동북쪽을 향해 물러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저 멀리서 파란색 하늘이 광속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리워 있던 태양은 구름 그림자들 사이사이로 빛을 보내고 있었다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먹구름이 파란 하늘을 덮고 폭우를 뿌려대다가 다시 파란 하늘에 자리를 내 주는 데까지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빗방을이 내 머리 뒤편 동북쪽 땅에 떨어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 나는 길 위에 뿌리 내린 나무처럼 서 있었다. 판타지 영화가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 것만 같이 아찔한 광경이었다눈으로, 코로, 입으로, 귀로, 온몸으로 쏟아지던 비를 직접 보고 듣고 삼키고 만졌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꿈에서 방금 깬 것처럼 상황이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곧이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비맞은 강아지가 온몸을 흔들어서 몸에 묻은 비를 털어내는 것처럼, 나는 몸을 부르르 떨고 나서 무턱대고 하늘을 향해 물었다.

"제가 방금 본 이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누가, 이런 것을 보게 하신 겁니까?"

물론, 하늘이 고분고분 내가 알아듣는 말로 대답해 주었을 리가 없다. 하늘이 아래 사진처럼 되었을 때,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성전에 참배하러 간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면서몇일 전에 까미노와 기차를 비교했던 것이 생각났다. 어쩌면까미노는 기차보다는 우리 일생과 더 비슷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때 문득 들었다. 태어나는 곳은 출발한 마을, 삶의 목표는 산티아고,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까미노 위에 선 순례자앞서간 사람들과 뒤에 올 모든 사람들 중 내가 현세에서 만난 사람은 하늘이 정해준 인연으로 비슷한 시기에 출발해서 까미노 위에서 만나게 된 순례자화살표는 목적지를 정하고 길을 떠난 사람을 위해 앞서간 모든 존재들이 준비해 둔 계시비구름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구름 뒤에 있는 파란 하늘과 해와 별과 달은... 그리고 이 모든 것은.. , 아아. 아아아

 

배낭을 메고 까미노 위에 서 있는 사람만 순례자가 아니다. 길을 걸을 때에만 살아 있음의 신비를 실감하고 경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길 위에서만 우주의 존재들이 온몸으로 전하는 찬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까미노가 끝나면 돌아가야만 하는 그 곳에서 일어나는 일상이 진짜 여행이다.

길 위에서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에서는 길을 그리워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길을 가다 멈춘 곳이 그 날의 집이고, 집을 나선 모든 사람은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길 위에 선 순례자다아스팔트를 걷건 산길을 걷건 사무실 안의 모노륨 위를 걷건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눈에 보이는 모든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 알고 있는 모든 것과 알지 못하는 모든 것, 지나온 모든 것과 앞으로 올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티로와 약속한 칼자딜라 데 라 쿠에자(calzadila de la cueza)에 도착했을 때, 티로는 마을 입구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나는 내가 느낀 것을 티로도 느꼈는지 궁금해서 물었다티로는 언제 그칠지 모르는 폭우 속에 가만히 서 있다가는 체온이 떨어지고 기운에 압도 당해서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며,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좀 시시했다.

 

우리는 따로 확인하지 않아도 마음이 잘 맞았다. 이 날은 알베르게에서 묵기로 했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아는 순례자 몇몇이 마을에 있었다오랜만에 진도 만났다엄청난 경험 때문에 흥분해서 옆 테이블 사람이 먹다 남긴 와인까지 가져 와서 마셔 대는 내게티로는 그만 마시라고 두어 차례 경고했다진은 둘이 투닥거리는 것이 마치 오래 같이 산 부부 같은 느낌이 난다고 했다. 나중에 티로도 그 말에 동의했다.

식당의 젊은 웨이터는 너무 귀여웠다. 내가 너무 귀엽게 생겼다며 좋아하니까 티로가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보란 듯이 뱀이 나무를 친친 감는 것처럼 청년을 안았다. 기대한 반응은 없었다

 

3 25, 18일차의 여행은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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