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한동안 또 덮어 놓다가, 두고 볼 것도 없이 앞으로도 이런 식이겠지. 

 

한때, 강한 동기와 목표의식을 가지고  아무리 노력해도 일이 안 되길래 

목표를 잊고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자세로 살면 안 되던 일이 될 줄 알았다. 순진하게도. 

그래서 한동안 실제로 아무 생각 없이 살기도 했는데, 그런다고 또 뭐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초심자의 운 때문이었는지, 삶의 자세를 180도 바꾸고 나서 아주 잠깐, 들인 노력에 비해 보상을 많이 받기도 했는데, 오래 가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목표를 잊은 게 아니라 잊은 척 한 거였다. 

!!!

 

계획을 치밀하게 세운다고 해서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내 그럴 줄 알았지' 하며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고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뜻'이라는 것이 있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하더라도 나의 원래 뜻과는 다른 결과가 나온다. 그러니 더욱 결과에 초연하기로. (음. 나의 순례기는 내가 세상에서 없어지면 끝이 나겠군.)
여튼. 

그새 많은 일이 있었다. 5년 전의 순례도 진작 끝났고, 티로의 생일도 지나갔다. 

티로를 만날 때마다 하던, 생리도 끝나가고 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거지? 오늘은 노동절이고 나는 사무실에 앉아 있다. 

 

폰 페라다에서 비야프랑카델비에르조로 떠난 날은 2010년 4월 2일, 금요일이다. 

휴일 같지만, 마침 오늘도 금요일이다.  

티로를 못 만난 지 5일째로 접어들었고, 샤나, 엘렌, 디니는 거의 매일 하루에 한 번 이상 만난 것 같다. 

 

이 날은 웬일로 몹시 착했던 하루였다. 

수첩 한 가득 잘못했던 일들을 적고는 '반성한다'고 써놓았다. 

제일 먼저, 엄마한테 못되게 군 것을 엄청 반성한다고 써 있는데, 음, 지금도 그러고 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것은, 반성 철회. 그 때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에너지와 시간과 돈을 과소비한 것은, 음, 한동안 반성 모드로 살았는데 최근 들어 소비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안 그럴 수 있었으면 안 그랬겠지. 내가 악당도 아니고. 

내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는, 지금 시점에서 보면 내 몸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으로 바꾸어서 반성하고 싶다. 

 

며칠 동안 티로를 못 봤는데, 보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버벅거리다가 중요한 말들을 까먹게 될까봐 

수첩의 다음 장에는 티로를 만나게 되었을 때 해야 할 말들을 적어 놓았다. 가우디 이야기, 사업 이야기, 치유하는 방법, 취향, 선입견, 명상, 복권, 그리고 사과하기. 지금 보니 그렇게 중요한 주제들도 아니구만. 늘, 매일, 티로와 다시 만나게 되면 나눌 이야기들을 적던 시간들. 가장 눈에 띄는 말은, "할 말을 이미 다 나누어서 더이상 할 말이 남아 있지 않다"라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세상에 나가서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겠다"에 대한 나의 의견. 얼마나 많은 사람을 치료할 것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 명을 제대로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 한 명은 바로 자기 자신. 

 

엄마 아빠 문제가 이 날 좀 풀린 것 같기도 한데, 시간이 지나 별 무소용이 되었다. 

둘다에게 착하고 싶었고 평화를 좋아했던 나는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싫었다. 

싫었던 것의 근원에 있던 것은,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묵은내가 나는 사랑이었다. 

수첩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무엇이든. 내 의지, 내 선택, 내 행동의 결과다. 피해자인 것처럼 굴지 말자." 

어떤 것이든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는 그 때의 생각에는 지금도 동의한다. 

떼를 쓸 일이 아니다. 

 

아래 사진은, 아무리 작은 마을을 가도 꼭 있는 부활절 퍼레이드, 세마나 산타. 

 

 

 

 

어느날 티로와 걸을 때 무지개를 본 다음부터, 무지개가 특별해졌다. 

 

빈 교회에 들어가 봤더니 세마나 산타에 쓰이는 각종 소품과 가마와... 솔직히 좀 그로테스크했다. 

 

 

흔한 풍경들. 다른 계절은 어떤지 궁금하기는 하다. 

 

 

 

 

웬만큼 더러움에 익숙한 내가 기겁을 한 컴퓨터와 키보드. 해도해도 너무했어. 지금도 그 감촉이 생각난다. 키보드를 두드릴 때마다 손가락 끝에 쩍쩍 달라 붙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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