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30일 화요일, 걸은 지 23일째 되던 날에는 아침 8시 30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7시간 동안 16km 간 다음에 더이상 가지 않고 멈추었다. 분명히 뒤에서 걷고 있는 건 확실한데,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아무리 못해도 지난 사흘간 최소한 한두 번은 마주쳐야 하는데 마주치기는 커녕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던 티로와의 거리가 더 벌어질까봐 빨리 걸을 수 없었다, 고 생각한다. (그때는 그걸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는 말이다.) 바에서, 혹은 알베르게에서는 아는 사람을 만나건 모르는 사람을 만나건, 아~주 오랜 시간을 전반적이고 무난한 순례 이야기로 보낸 다음, 내가 아는 누구를 혹시 그도 아는지, 우리가 서로 아는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소식을 물었고, 티로는 차례차례 이름 불리워진 순례자들의 맨 마지막에서 두어번 째쯤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튼. 30일 아침에 바이커들이 자전거를 점검하는 동안 나는 먼저 숙소를 떠났다. 걸은지 1시간 가까이 됐을 때, 뒤에서 바이커 하나가 나를 불러세웠다. 전날 호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의 바에서 라바날의 그레고리안 성가를 적극 추천했던 호세루(Joseluis)였다. 자전거를 급히 세운 호세루는 내게 다짐하듯 물었다. "어제 내가 말한 거기가 어디라고?" 내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호세루가 말을 이었다. "라바날이야. 아스토르가가 아니고." 

아니, 그 말을 하려고 그 아침에 혼자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 거야?

 

바람처럼 사라져가는 호세루의 뒷모습을 보며, 한참을 울었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문을 열라고 열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조금 연 문틈으로 사정 없이 몰아쳐 대던 인간은 나몰라라 하고 떠나 버렸고, 정작 조건 없이 호의를 베푸는 낯선 이들에게서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 그 상황이 대책 없이 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마워, 호세루. 고마워, 필리. 고마워, 카누토. 고마워, 이케. 고마워, 밀리.

사진을 보니 이날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난다. 이상한 상징물들을 지나서 언덕을 올라갔는데 창고처럼 생긴 집이 뜬금 없는 곳에 있었다.

바인가 하고 들어가 봤더니 아무도 없었다. 창고 같이 생긴 안은 넓고 어둡고 추웠는데, 구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웬 거지 차림을 한 남자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나 나왔다. 여기는 뭐하는 데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그냥 거기 살고 있고, 필요한 건 밖에 있으니까 알아서 먹고 알아서 돈 내고 가란다. 초록색의 간이 포장마차 안에 커피며 쿠키며 등등이 놓여 있었다. 먹고 싶은 것도 마시고 싶은 것도 없어서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화장실을 가야하나 하고 잠깐 생각했는데, 아무 것도 안 보태고 화장실을 쓰는 게 좀 미안해서 그냥 나왔다.

 

그리고 결국, 저 집을 나와서 30분쯤 걷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노상방뇨'라는 것을 했다. 그간 티로와 함께 있으면서 몸에 밴 'why not.' 정신으로. 기분이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까미노 노상방뇨 이야기는 여기저기에 가끔 나온다. 방광은 터질 것 같고, 화장실은 없고, 어쩌라고.

 

걷다 보니 갈림길이 나왔다. 허허벌판이었는데 화살표가 없었다. 앞뒤로 사람은 없고, 어찌할 바를 몰라서 멈춰 섰는데, 길 위에 순례자들이 자갈로 만들어 놓은 화살표가 보였다.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 놓았을. 바람에 자갈들이 잠시 흐트러졌더라도, 뒤에서 걷던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뒤에 올 다음 사람을 위해 다시 가지런하게 정돈해 두었을. 눈물이 솟구쳤다. 이렇게 뒷사람을 생각하는 마음들이 모이고 모인 곳이니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은 거겠지.  

 

 멀리 마을이 보였다. 20일 쯤 걸으면 눈으로 거리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앞에 보이는 집들은 약 2km 떨어져 있으니 기어 가도 1시간이면 통과하게 될 것이고 멀리 보이는 집들은 4~5km 떨어져 있으니 천천히 걸어도 1시간 반이면 족할 것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가니 '오아시스'라는 이름의 바가 있었다. 티로와 함께였다면 '오아시스인데 당연히 목을 축이고 가야지'하며 들어갔을 것 같아서,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세 시간을 기다렸는데 티로는 커녕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래 사진은 길 한 가운데서 딱 마주친 강아지. 서로 한동안 기싸움을 하다가 내가 먼저 봐 줬다.

 

아스토르가(astorga)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더 걸어갈 수 있었는데, 그냥 멈추기로 했다. 가우디가 지었다는 건축물도 보고 싶었고, 티로 소식을 듣고 싶기도 했다. 아래 건물은 아마 시청 쯤 됐던 것 같다.

 

저기 아래에 단단하게 지어진 건물이 가우디의 작품이다. 바르셀로나에서 봤던 것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뭐지? 좋은 건지 그냥 그런 건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티로였다면 뭐라고 했을까. 티로였다면, 티로가 있었다면. 젠장할.

 

 

숙소에 체크인을 하는데, 순례자나 마을 사람들이나 모두 조금씩 들떠 있는 것 같았다. 몇 시에 무언가를 한다는데, 모르는 단어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몇 시가 되기 전에 카메라를 들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앞에, 내가 좋아하는 체구의 남자가 특이한 복장을 하고 걸어가고 있었다. 해질 무렵이었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조금 기다렸더니, 그 무슨 행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제사 그들이 흥분해서 말한 단어가 '프로세시옹'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을 사람 대부분으로 추정되는, 엄청 많은 사람들이 정해진 복장을 하고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레온에서 보던 것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뒤늦게 알게된 거지만, 스페인의 웬만한 마을들에서는 부활절을 앞둔 몇일간을 '세마나 산타'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계속 저런 행진을 한다고 한다. 나야 처음 보는 광경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매일 해야 하는 사람들은 매일 똑같이 의례와 행진에 전념할 수 있을까 싶은데, 그들은 매일 진지했고 매일 최선을 다했다.

 

아래는 수첩에 적혀 있던 내용들.

 

1층 침대만 있는 숙소, 오랜만이다. 너무 좋다. 나가서 필요한 것들 좀 사고 박물관에 가야지. 그 전에 맥주 한잔.

 

세상 일 참 뜻대로 안 된다. 병 고치러 왔다가 병 나서 가겠다. 최진영은 또 왜 그랬을까.(이 날 그의 자살 소식을 전해 들었다.) 호세, 마르코를 알베르게에서 만났다. 샤나, 엘렌, 로 등은 중간 갈림길에서 좀더 돌아오는 코스를 택했다고 한다. 나는 걷는 것을 싫어하니까.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알베르게에 묵었다가 피네스테레에 갔다가 다시 산티아고로 가서 파라도르에서 묵어야지.

메신저들에게. 나는 잘 있다고 전해 주시길.

한국에서 온 여자를 만났다.

버프를 샀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하는 수 없다.

티로를 만나면 나눌 이야기들 : 어린이(티로는, 뭘 할 건지 정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유난히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곰곰 생각한 끝에 나는 아이들과 같이 노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화살표 사인이 주는 의미, DBEW, 동북아시아, 개, 박물관, 교회, 십자가, 그리스도, 샐러드, 참치, 요플레, 바나나, 별자리, 음양, 먹는 순서, 정기신, 명상 등.

(반은 알겠고, 반은 모르겠다.)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깜짝 놀랐다. all by myself를 부르고 있었다. 나오는 노래 하고는. 라바날 지나서는 뒷일 생각하지 말고 가능한 한 많이 걸어야겠다. 9시부터 6시까지 9시간 동안 3km를 걸으면 하루에 27km를 걸을 수 있고, 그러면..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시간이.. 3월 30일에서 17일을 더하면.. 4월 중순.. 

 

길에서 만난 그들의 직업은..

재무 컨설턴트, 방송인도 있었지만 소방수, 경찰, 정원사, 간호사, 학생, 그리고 대부분은 실업자, 빈민. 한 순례자가 자기 직업을 자랑스럽게 'gardener'라고 말할 때 깜짝 놀랐다.

 

수퍼에서 참치 사고, 요플레 사고, 와인을 사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Jin과 Thilo 덕에 수퍼에서 무언가를 살 수 있게 됐는데. 둘다 대체 어딨는 거니? 산티아고로 계속 걷지 말고 여기서 딱 멈춰 버린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계속 걸을 수 있었지, 물론. 그렇지만 계속 걷는 것보다 그쯤에서 그만 두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아서 그냥 멈췄을 뿐이야." 하고 친구들한테 말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니,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남들 다 가니까 나도 갔어야 하나? 다시 까미노와 인생을 비교하게 된다.

 

셀레스티노와 호세를 만났다. 호세는 길에서 만난 한국인 여자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징표를 보여 주면서 "이랬었는데, 이게 사랑이 아니라고?"하며 내게 거듭거듭 물었다. 나는 그만, 같이 얼싸안고 울고 싶어졌다.

빠리로 가는 저가 항공을 누군가가 알려 주었다. Girona? 라고 써 있는 공항에서 빠리까지는 100유로면 된단다.

 

(그리고, 수첩에는 그간 만났던 순례자들의 이름이 죽 써 있다.)

Annie, Chris, Christian, Suzan, 오츠카, Alex, Aulelio, Florian, Omori, Alan, Diny, Ellen, Yoerg, Kike, Ro, Marco, Laszno, Genaro, Carlos, Claudia, Thilo, Diana, Holgut, Rene, Nora, Laura, Pedro, Shanan, Jin, Adrian, Inge, Maro, Francois, Rudi, Biati, Rudi, Fangyang, Jennifer, Pili, Canuto, Mili, Joselu, Iker, Cyndi, Jose.

(역시, 반은 알겠고 반은 모르겠다.)

 

 

 

알베르게의 1층 거실에서 그날 새로 만난 순례자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신 나는, 그들과 몹시 친해져서는 꼭 서로 사진을 교환하기로 하고, 메일 주소와 전화번호를 주고 받은 다음 잠이 들었다. 아마도 이 알베르게에서 다시 알렉스를 만났던 것 같다. 얼굴 못 본지 열흘도 넘었지? 건강하게 계속 걷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길 위에만 있으면,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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