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에 빠리 오스테를리츠(Austerlitz) 역을 출발한 밤차는 다음날 새벽 6시 40분에 바욘(Bayonne)에 도착했다. 바욘 역앞 크롸상이 맛있다고 책에 써 있길래 역 근처 가게를 둘러 보았는데, 입에서 영어가 안 나와서 (그렇다고 불어는 더더욱 할 수가 없고) 배는 고팠지만 포기했다. 한편 더부룩하고 또 한편 출출하기도 한 배를 부여잡고 칼바람을 맞으면서 낯선 역 광장에서 쇼 윈도우  안을 하염 없이 들여다보고 있는 꼴이라니. 내 돈 내고 빵도 못 사먹는 얼뜨기였다. 그 때 나는.

 

바욘에서 생장피드포르(Saint-Jean-Pied-De-Port)로 가는 버스 정거장을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역무원들한테 물었더니 "건물 밖으로 나가서~~ 브라브라" 하는데 건물 밖에 나가서 어디로 가야한다고 말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거듭 물어볼 용기가 없어서, 알아 들은 척 하고 일단 건물 밖에 나갔지만 안내판이 아무 데도 없었다.(있었을 수도 있다.) 역을 한바퀴 돌았지만 허사였다. 역에서 좀 떨어진 곳까지 진출해서 사람들한테 물어 보려고 했지만 이른 아침이라 물어볼 사람이 없었고, 사람을 만나서 어렵사리 입을 떼도 다들 잘 모르겠다고 했다. 버스 하나가 역 광장 쪽으로 가서 서길래 뒤뚱거리면서 달려가서 물었더니 생장피드포르로 가는 버스라고 했다. 역 건물을 나서자마자 바로 왼편에 있는 광장 비슷한 곳이 버스 정거장이다. 무조건 버스에 탔다. 몇 시에 출발하는지는 확인하지도 않았다. 꼭 필요한 말만 짧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우물우물. 그간 외국인을 상대로 영어로 10초 이상 말을 해본 적이 있었어야 말이지.

 

막막함이 밀려왔던 것 같다. '자신을 잘 돌보고 몰아세우지 않기' 뭐 이런 말이 그 날 수첩에 써 있었는데, 이 날 교통편을 갈아타면서 밀려온 건 한심함과 참담함이었다. 이걸 어떻게 안 몰아세우고 두고 보라는 말인지. 

 

바욘에서 생장포드피르로 가는 버스는 7시 45분에 출발했다.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웬 여성이 같은 버스를 탔는데, 낯선 사람한테 말을 거는 게 어색해서 그냥 모른 척 했다.

 

 

 

SJPDP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8시 45분이었다.

 

비행기를 오래 타고, 공항에 내리자마자 다시 밤기차를 타고, 밤을 새서 달려가서 새벽에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간 길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가이드북도 없이 떠났고 지도를 본 적도 없어서 프랑스 어디쯤 붙어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짐짓 태연한 척하며 표지판 쪽으로 걸어갔지만, 표지판에는 어디로 가야 크레덴셜을 받을 수 있는 건지 알 수 있는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역시, 있었는지도 모른다. 불어로.)

 

몇몇 사람이 움직이길래 나도 그 쪽으로 갔는데, 그들은 순례자가 아닌 모양이었다. 아래는, 동네를 한바퀴 돌다시피 하며 어찌어찌 헤매다가 도착한 사무실 건물 입구.

 

 

 

 

9시에 도착한 사무실에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다. 피레네를 넘어 가겠다고 했더니 최근에 눈이 많이 와서 그 길은 막혔다고 했다. 길이 열려 있다고 해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 시간에 출발해서는 절대 안된다며 다른 길을 알려 주었다. 크레덴셜을 받고, 알베르게가 적혀 있는 A4 용지 한 장을 받고, 순례자의 상징이라는 조개를 가지고 그 곳을 나오려고 하는데 키가 2m는 됨직한 서양 청년을 만났다. 크리스틴라는 그 청년은, 스스럼 없이 다가와서는 자기도 방금 도착했는데 그날은 사무실 옆 알베르게에서 하루 쉬고 다음날 출발하겠다고 했다. 처음 만난 순례자가 신기해서 나도 하루를 거기서 묵을까 하다가, 그냥 그 길로 내쳐 움직이기로 했다. 

 

 

 

조개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들의 상징이다. 배낭에 조개를 달고 있는 사람은 단순한 배낭여행자가 아니라 성지를 찾아 가는 순례자다. 그날 이 사무실에 2유로를 기부하고 배낭에 달고 나온 조개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내 배낭에 달려 있었고, 지금은 각종 사건사고로 인해 흩어져 내린 묵주알들이 담겨진 채 책상 한켠에 놓여 있다.

 

 

 

 

 

 

그나저나, 피레네를 못 넘는다고 하니 산 옆을 돌아 발카를로스(Valcarlos)라는 마을로 갈 수밖에 없었다. 대략 방향을 확인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좀 가다가 한 가게에서 스틱 2개를 샀는데, 처음 사용하는 거라 영 익숙지가 않았다. 나는 설레는 마음에 가슴이 벌렁벌렁했는데, 매일 순례자들을 만나는 가게 주인은 무심하기 그지 없었다.

 

(여기서 잠깐. 스틱은 도대체 어떻게 쓰는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왼발 나갈 때 왼쪽 스틱을 짚으라는 건지 오른쪽 스틱을 짚으라는 건지. 다른 사람들을 봐도 다 제각각이었다.)

 

SJPDP에서 발카를로스까지는 14km라고 했다. 아무리 산길이지만 시속 3km씩 5시간만 걸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조개 모양이나 화살표 모양의 표지판만 잘 따라가면 되는 거였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SJPDP를 떠난 시간은 오전 10시. 눈에 보이는 풍경은 이국적이었지만, 아직 아무 것도 실감나지 않았다.

 

 

 

 

아래 표지판은 아마도 처음 본 조개 표지인 것 같다. 사진씩이나 찍어 놓은 걸 보면. 피레네를 넘는 경우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조건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까지 27km는 걸어야 한다. 그 전에는 마을도 없고 묵을 곳도 없기 때문이다. SJPDP에서 6시간 20분 걸린다는 얘기인데, 그건 잘 걷는 보통 사람들 경우고. 나는 안 걸어봐서 모르겠다.

 

 

 

 

 

 

내가 갈 곳은 아래 표지판이 가리키는 발카를로스다. SJPDP에서 본 개천은 산을 오르면서 점점 좁아지고 가팔라졌다.

 

 

 

 

 

 

부지런히 걸었는데도 발카를로스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가 넘어서였다. 개울을 따라서 죽 산길을 올라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개울을 건너가야 했는데, 표지판을 못 보고 계속 산을 올라가는 바람에 최소한 3km는 더 걸었기 때문이었다. 걸어도 걸어도 계속 아스팔트로 된 산길이었는데, 물어볼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계속 걸어 올라갔다. 산꼭대기에 있는 어느 작은 마을에서 프랑스 아주머니를 만나서 손짓발짓 끝에 들은 말은, 온길을 돌아서 한참을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거였다. 배낭이 너무 무거워서 이를 악물고 걷고 있었던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방금까지 걸었던 길을 되돌아가는 일은 너무 힘들었다. 까마득히 멀리, 산 아래에 작은 마을이 있는 것이 보였다. 제대로만 갔으면 벌써 도착해서 씻고 쉬고 있을 시간이었다. 억울한 마음이 다시 울컥 솟았다.

 

길옆을 따라 이어지던 그 작은 계곡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일 줄이야. 어느 지점에서 스페인 땅으로 쏙 들어갔어야 했는데, 나는 국경을 따라 계속 걷고 있었던 거였다. 갑자기 배낭이 두배는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발카를로스에 갔을 때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동네에 하나 뿐이라는 알베르게는 문이 닫혀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니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분이 급할 것 하나 없는 듯한 나른한 표정으로 와서는 알베르게의 문을 열어 주었다. 순례길에서 만난 첫 숙소였다. 남녀가 같이 쓰는 곳이라고 한다. 여자는 문을 열고 닫는 방법과 전원 스위치의 위치 등을 간단히 알려주고 어디로 간다 말도 없이 가버렸다. 아니, 이 낯선 곳에 나를 혼자 두고 가버리다니. 성격 독특한 다른 순례자라도 오면 단둘이 이 밤을  어떻게 보내라고. 사람들이 비품을 다 훔쳐가 버리면 또 어떻게 하려고. 온갖 상상을 하면서 걱정을 만들어서 하느라고 숙소 밖으로는 한발짝도 못나갔다.

 

 

 

 

아래는 숙소 창에서 본 바깥 풍경. 전혀 스페인 같지 않지만, 아침에 떠난 SJPDP의 날씨와 비교하기 위해서 올린다. 능수버들 우거져 있던 그 곳은 봄이 완연했는데, 여긴 겨울이 완연했다.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했던 관계로, 남은 부분을 요약하고 메모하는 데 저녁 시간을 보냈다. 밥은, 그냥 굶기로 했다. 혼자서 밥 먹는 것 자체가 익숙지 않았는데, 이역만리 타국에서 잔뜩 긴장한 채로 퍼렇게 질려서 혼자 밥먹는 것보다는 차라리 굶는 게 나았다.

이제나 다른 순례자가 오나 저제나 이상한 도망자가 오나 노심초사했는데, 다음날 보니 나는 그날 밤 그 알베르게에서 잔 유일한 순례자였다.

 

길에서 만난 작고 까탈스럽고 열라 짖어대는 숱한 개들을 쫓아주시던 동네 할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분들에 대한 감사의 메모가 수첩에 적혀 있다. 크레덴셜을 보니, 이날 잔 알베르게의 스탬프에 ATERPEA라고 쓰여 있다. 이것이 이 동네의 다른 이름인지 알베르게의 이름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해서 잠자리에 든 시간은 저녁 7시 반.

 

 

 

 

 

3년 전의 3월 7일처럼, 오늘도 퍽이나 길고 힘들었다. 단숨에 이틀을 여행했고,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나씩 했다. 잘 했는지 못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내일도 그럭저럭 할 수 있을지 또한 알 수 없다.

 

오늘 새벽 4시부터 시작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시간은 밤 10시 반. 내일 걸어야 할 길을 생각한다. 론세스바예스까지는 산을 돌아서 간다고 해도 20km가 안될 것이다. 힘이 남아 돈다면 거기서 6.4km 떨어진 마을까지 더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신이 허락한다면, 6시 반부터 시작해서 아마도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게 될 일을 탈없이 마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다행히 하루를 벌었으니, 3년 전 3월 8일과의 조우를 느긋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다행이다.

 

 

 

내일은 어쩌면 엄마를 만나러 가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는 엄마아빠를 만나는 날이 다시 기다려진다.

 

가족과의 관계는 까미노 이전, 까미노 직후, 까미노 이후, 그리고 최근까지, 크게 네 번 바뀌었다. 어떻게든 떨어져 있고 싶었고 떨어져 있을 때도 없는 듯이 잊고 지냈던 때, 무조건 고맙던 때, 믿고 감사해야 하는 당위와 도저히 그럴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헤매던 때,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되는 지금으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