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5일 아침에 로스 아르코스의 알베르게를 떠난 시간은 8시. 그 때부터 오후 5시까지 장장 9시간동안 28km를 걸었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한발한발 가다 보니 그렇게 됐다. 따져 보니 점심 먹고 쉬는 시간을 포함해서 매일 시속 3km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침에 본 로스 아르코스는 꽤 큰 마을이었다. 짐을 풀고 씻고 나면 식당까지 걸어갈 힘도 없기 때문에, 저녁에 동네를 산보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다.

 

성당 비슷한 것을 보면 늘 들어가보고 싶은 마음이 솟았지만, 아침부터 힘을 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지나쳤다.

 

 

 

 

같은 숙소에서 묵은 사람들은 비슷비슷한 시간에 길을 나서기 때문에 처음에는 거의 일렬로 걷는다. 시간이 가면서 점점 제 속도를 찾게 된다.

 

 

 

 

길이 외길일 때는 무념무상으로 걸어가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

 

 

 

 

갈림길에서 화살표가 눈에 띄지 않을 때는 살짝 당황스럽다. 사람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져서 화살표를 찾는다. 한 발짝도 허투루 낭비할 수 없기 때문에, 신중하게 살펴보고 확신이 생길 때에만 발을 뗀다. 그렇기 때문에, 뒤따라 걸어가는 사람은 마음 놓고 앞서 간 사람이 선택한 길을 갈 수 있다. sansol에서 앞사람들이 헤맸던 건, 건물 양쪽에 화살표 표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건물 모퉁이에서 서성이던 그들은 조개 표시가 있는 공식 화살표를 택했고, 나는 그들을 택했다.

 

 

 

 

앞에 마을이 보인다고 해서 긴장을 풀어서는 안된다. 눈으로 보고 거리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1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줄 알았던 곳이 실제로는 1시간 10분이 걸리는 경우, 그 마지막 10분이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코앞에 마을이 보이거나 말거나, 시작할 때와 똑같은 마음으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걷는 것이 중요하다.

 

 

 

 

 

 

 

가깝게는 2km, 멀리는 20km를 가야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입구의 첫번째 바는 언제나 순례자들로 북적거린다. 바에서 다음 마을까지의 거리, 오늘 숙박할 마을 등의 정보를 주고 받고, 충분히 쉰 후에 다시 길을 떠난다.

 

 

 

 

아래 사진은 순례자들이 죄다 바(BAR)로 몰려 들어가고 길에 남은 배낭들. 처음에는 누가 가져가면 어떡하려고.. 하며 걱정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배낭은 순례자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별 소용 없는 것들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순례자들은 차라리 누가 자기 짐을 가져가 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인간들이지 남의 것을 더 가져 올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는 인간들이다.  

 

 

 

 

휴식이 끝나면 다시 차례차례 길 위에 선다. 혼자 온 사람은 혼자 걷고, 동행이 있는 사람은 동행과 같이 걷는다.

 

 

 

 

 

 

 

 

 

 

 

 

 

 

 

 

 

 

 

 

 

 

 

 

 

저런 호수와 저런 성당이 있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몇일간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길이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몇몇 동행들과 비아나(viana)에서 헤어져서 9.4km 떨어져 있는 로그로뇨까지 걸었다. 헤어지는 길에 "부엔 까미노!(buen camino!)" 하고 인사했는데 한편 자연스러웠고 한편 영영 이별하는 것 같아서 서운했다.

 

로그로뇨에는 숙소가 하나 있었는데,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것이었다. 남녀 화장실이 따로 있는 숙소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훤히 비치는 샤워실이 남녀 공용이었던 건 좀 불편했지만.

 

샤워를 하려고 보니 비누와 샤워 퍼프가 없었다. 로스 아르코스 숙소에 놓고 온 것이 틀림 없었다. 비누는 다행히 하나가 더 있기는 한데. 샴푸에 머리 핀에 비누에 샤워 퍼프에... 이렇게 거의 매일 질질 흘리고 다니다가 끝에 뭐가 남을지 모를 일이다. 비아나에 남은 사람들이 많아서 이날 숙소에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로가 책에 나오는 것처럼 팬티만 입고 돌아다녀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3년 전에 28km를 걸었으니까 오늘은 무리하지 말아야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낮잠을 너무 많이 잤다.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인데 어쩌자고 나는 청소하고 낮잠 자고 잡문 쓰면서 시간 다 흘려 보내고 이제는 'TV 다시보기'를 할 마음을 먹고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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