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9일 금요일 아침, 빌람비스티아(villambistia)에서는 다른 때보다 조금 늦은 시간인 8시에 나왔다. 이날 티로는 내가 숙소에 두고 나온 가이드북(레온 지방 안내소에서 가져온 것)을 주워서는 '나는 니가 또 이렇게 질질 흘리고 다닐 줄 알았어'하는 표정으로 쓱 내밀었다.

 

이 날은 비가 꽤 왔다. 전날 우의를 전해받지 않았으면 낭패를 볼 뻔 했다. '내가 뭔가를 계속 질질 흘리고 다녀도 계속 불편 없이 살 수 있는 건 이렇게 누군가 뒤에서 말없이 살펴주고 있기 때문인가?' 하는 겸손한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다시 든 생각은 '내가 좀많이 덜렁거리기는 하지만 아무 걱정 없다. 잘 찾고 잘 챙기는 사람이 옆에 있기만 하면 된다.' 뭐 이런 버릇 없는.

 

 

 

이날은 하루 종일 티로와 걸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고, 서로 인생에 관여할 가능성도 적기 때문에 친한 친구한테도 절대 할 수 없는 말들을 많이 하게 된다. 티로는 무엇인가를 계속 내게 물었고, 나는 기억나는 범위 안에서 성실하게 대답했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거나 이해는 되는데 영어가 안 되는 말은 그냥 넘어갔다.

 

티로도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몇 개 안돼서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여튼 그간 엄청 운이 나빴다는 것, 런던과 뉴욕에서 꽤 오래 있었다는 것, 침술사이자 작곡가, 색소폰 연주자, 웹 프로그래머, 명상가라는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티로와 함께 걷는 것은 여러 모로 편리했다. 일단, 우리 식대로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늘 스파게티도 먹고 싶고 스테이크도 먹고 싶었던 나로서는 안성마춤인 짝이었다. 또, 내가 술을 몹시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채 준 덕분에 점심 때부터 메뉴델디아에 딸려 나오는 와인을 같이 마실 수 있었다. 그간 혼자 먼 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에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한두잔 홀짝거리는 게 다였는데, 둘이서 편안하게 먹다 보니 순식간에 각 1병을 비우고 술기운을 빌려서 나머지 일정을 소화했다.

 

 

한번 다른 마을에서 묵기 시작하면 매일 보다시피 하던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을 완전히 지치게 하는 거리가 비슷하기 때문에 저녁에 멈춰서는 마을이 계속 어긋난다. 이날 묵었던 아타푸에르카(atapuerca)도 그리 크지 않아서 순례자들이 그 전 마을에서 많이 멈추는 것 같았다. 이날 묵었던 숙소는 방 하나에 침대가 4개씩밖에 없어서 숙소가 아니라 집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화장실도 남녀가 따로 쓸 수 있는, 나름 최고급(!) 알베르게였다.

 

이 날 11시간 동안 걸은 25.5km의 길은, 지루하고 지루하고 지루했다. 초반에 작은 마을 한 두개를 지나고 나면 10여 km가 넘도록 내리 풀밭과 낮은 언덕들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저멀리 보이는 눈덮인 산길을 안 걷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움직이려니 컨디션이 장난 아니다. 요즘은 하루에 두 번씩 낮잠을 잔다.

 

아침 5시 반에 일어나서 6시에 집에서 나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8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잠시 두어 시간 잔다. 열시 쯤부터 그날 할 일들을 준비하다가 출출해지면 점심을 먹는다. 두시쯤 다시 잠깐 눈을 붙인다. 네시쯤 일어나서 저녁 일정에 맞게 움직이다가 밤 11시쯤 귀가. 12시~1시 사이에 잔다. 요며칠 계속 이렇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새 날이 온 것 같다. 하루를 삼모작해서 사흘처럼 살고 있는 셈이다. 가뜩이나 지루해 죽겠는데 정말 죽을 맛이다. 졸려서 죽을 것 같다. 오늘 밤도 청운의 꿈을 안고 시작했건만, 부르고스까지 3일치를 복기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내가 서둘러 가는 동안 시간도 조금씩 앞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생각만큼 빨리 따라잡을 수가 없다.

 

 

 

이 날은 걷다가 결국 버프를 잃어버렸다. 체크무늬에 색깔도 튀지 않아서 엄청 좋아하는 거였는데. 티로도 버프는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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