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1일 일요일은 정말 길어도 너무 긴 하루였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날 일은 수첩에 아무 것도 써 있지 않은데도 마을 이름과 걸었던 거리에 대한 자료 만으로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다. 

부르고스(burgos)의 숙소에서는 여느 때와 비슷하게 7시쯤 나왔다. 다른 순례자들은 진작 길을 떠났는데 아침을 느긋하게 먹으면서 꼼짝 않는 티로 때문에 속이 터졌지만, 남의 시간 다 까먹고 혼자서 나몰라라 하고 갈 것 같지는 않아서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 주었다. 부르고스를 떠난 시간은 대략 10시 경이었다.

10일차 되던 3월 17일에 만난 이래 며칠째 하루에 거의 대여섯 시간을 티로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었다.

 

티로는 카메라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오로지 '명상'에 집중하려고 까미노를 걷기로 했고, 그래서 집을 나오자마자 삭발부터 했다고 했다. 별 목적 없이 카메라를 여기저기 들이대는 게 좀 무안해졌던 나는, 오전까지 몇 개 이정표만 찍고는 카메라를 배낭에 넣어버렸다.

 

아래는 부르고스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곳. 봄이었다.

 

그리고 아래는 타르다호스(tardajos)라는 곳에서 본 전체 지도. 얼추 반 정도 지나는 중인 것 같았다. 이 곳에서 그 날 묵은 혼타나스(hontanas)까지는 25km 남짓. 중간에 작은 마을이 딱 하나 있는, 죽음의 코스였다. 나머지는 모두 허허벌판이거나 산이었다.

 

날씨도 정말 유난히 변덕스러웠다. 흐렸다 맑았다 흐렸다 비왔다를 몇 번을 반복했다.

티로는 늘 옆에서 걷거나 조금 뒤에서 따라 왔다. 앞질러 가는 법은 없었다. 한동안 떠들어대다 지쳐서 잠시 대화를 멈추면 티로는 걸음을 살짝 늦추었다. 나는 혼자 걷고 싶을 때 혼자 걸을 수 있었고, 같이 걷고 싶을 때 같이 걸을 수 있었다.

한번은 바로 뒤에서 따라오는 줄 알고 우리나라 노래 몇 개를 서너 시간 동안 계속 부르면서 걸은 적이 있는데, 뒤돌아보니 티로가 없었다. 혼자서 몇 시간을 내리 걷고 있었던 거였는데, 그가 뒤에서 나를 봐 주고 있다는 생각 만으로도 씩씩하게 잘 걸어가고 있던 나는 그만, 갑자기 지치고 말았다. 그동안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헤어졌던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못 만나게 되는 건가 하는 생각 만으로도 서럽고 무서웠다.

 

흐리고 맑고 흐리고 바람 불고 비오는 날씨가 두세번 반복됐다. 혹시나 싶어서 걷던 길에서 돌아서서 뒤를 보니 (역시 티로는 보이지 않았고) 예상대로 하늘에 무지개가 떠 있었다. 선명한 세로줄의 쌍무지개는 한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카메라를 배낭 깊숙이 넣어버린 터라, 다시 꺼내려면 진창 위에 배낭을 놓고 한참을 뒤져야 해서 무지개는 마음 속에 간직하기로 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비가 씻고 바람이 말려서 티끌 하나 없이 맑기만 하던 서쪽 하늘이 점점 붉어졌다. 눈 닿는 곳 어디에나 두루 덧입혀진 노을빛 때문에 세상이 금가루를 뿌려 놓은 것 같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프랑스길은 계속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걷는 길이다. 지는 해를 향해 곧게 뻗은 길을 걷고 있자니, 프레임이 없는 그림 안으로 한발한발 걸어 들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살아 왔던 3차원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완전히 압도 당했던 건 사실이지만 무서워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경배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걸음을 뗐다.

 

그 아까운 장면을 혼자 보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생각나자 풀이 죽었다.

 

매번 수퍼에서 바에서 레스토랑에서 숙소에서 따로 계산하기 귀찮았던 나는, 이 때쯤부터 아침에 길 떠날 때 20유로 가량을 티로에게 건넸었다. "같이 계산해. 귀찮아."라고 말하며. 보아하니 티로는 나와 당분간 동행할 생각이었던 것 같았고, 나는 최소한 그 돈을 같이 다 쓸 때까지는 속도를 맞추자는 무언의 제안을 한 셈이었다. 같이 음식을 나눠 먹고 나서 티로가 카운터에 가서 "또도스(todos)"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해가 거의 넘어갈 때쯤, 티로가 나를 따라잡았다. 뭐하다 지금 왔냐고 물으니 그간 기회 있을 때마다 띄엄띄엄 말하던 '명상'을 하느라 그랬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음은 놓였지만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가야 마을이 있는지 물어볼 곳조차 없었다.

 

타르다호스에서 숙소가 있는 다음 마을까지는 10.2km다. 아침에 출발한 부르고스에서부터는 20km 가까이를 걷는 셈이 된다. 이때쯤 되면 걷는 데 익숙해진 순례자들은 20km를 걷고 하루 일정을 마감하는 건 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제는 그 곳에서 바로 다음 마을인 혼타나스(hontanas)까지는 무려 16km라는 것.(스페인의 안내소에서 받은 가이드북에 따른 것으로, 프랑스에서 받은 A4 한장짜리 숙소 리스트에 적혀 있는 거리와는 조금 차이가 있음.)

그 16km의 길 어딘가에서 티로가 나를 따라잡은 거였다. 나는 정말 지칠 대로 지쳐서 뒤에서 들려오는 응원 메시지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넋을 놓고 거의 무아지경의 상태로 걸어가고 있는데 길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창고 같은 건물이 하나 있었다. 불이 켜져 있었던 것 같은데, 길을 묻기 위해 100m를 옆길로 돌아가느니 그냥 가겠다는 나를 두고 티로가 그 건물로 갔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 티로는 오지 않았다. 해는 이미 졌고, 혼자 걸어 갈 힘은 없어서 하염 없이 기다렸다. 티로는 누구를 만나기만 하면 말이 길어진다. 혼자서 기다리는 데 익숙지 않은 나는 속을 부글부글 끓이면서 기다리다가도 티로가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너그러운 얼굴로 "어땠어?" 하고 묻곤 했다. 이 날도, 늦게 출발해서 결국 이렇게 개고생하게 되지 않았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티로는 돌아와서 절망적인 말을 건넸다. 한참을 더 가야 마을이라는 거였다. 그때까지도 발을 질질 끌면서 걷고 있었던 터라 너무 힘들고 기가 막혀서 퍼질러 앉아서 대성통곡을 하고 싶었지만, 앞으로 한발이라도 더 걸어가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었다. 눈물을 꾹 참으면서 아무 말 않고 묵묵히 앞서 걸었다. 가로등 없는 산길은 어둡고 질퍽거렸다.

10분쯤 지났을까. 낮은 언덕을 하나 넘으니 코앞에 갑자기 불빛들이 나타났다.

어디냐고 물으니 거기가 목적지인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까 왜 한참 가야 한다고 말했냐니까, 그 때 내 상태가 자기가 보기에도 더는 한발도 못 뗄 거 같았는데, 다 와 간다고 하면 내가 긴장이 풀어져서 다치거나 그 자리에서 뻗어 버릴까봐 그랬다는 거였다. 밤새 걸어야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자포자기해서 걷고 있던 나는, 빛의 속도로 마을로 달려갔다. 늦은 밤이라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숙소 간판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혼타나스의 사립 알베르게인 엘 푼티도(el puntido)에 도착한 시간은 밤 8시. 아는 얼굴이 몇 있었다. 엘렌의 엄마인 디니가 며칠 안 보여서 걱정했다며 가볍게 안아주는데, 안겨서는 나도 모르게 펑펑 울어버렸다. 다들 벌써 다 씻고 식사하고 쉬고 있던 터여서 샤워장은 두 칸이 다 비어 있었다.

들어가서 샤워를 하려고 보니 음.. 좀 그랬다. 샤워장 문과 샤워장을 두 칸으로 나누는 벽이 반투명 유리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별별 샤워장 다 가 봤지만 이건 정말 좀..  싶었으나 당장 씻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고, 상황이 이런 걸 보면 지가 들어 왔다가도 나가고 나중에 씻겠지 싶어서 안쪽에 들어가서 씻고 있는데 티로가 샤워장으로 들어와서는 옆칸에서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까미노 14일차. 산전수전 겪은 마당에 남녀유별 운운하며 촌스러운 멘트를 날릴 수는 없었다. 모른 척 하고 빨리 씻고 나가려는데 티로가 짖궂게 말을 걸었다. 이상한 장난질과 함께. 악의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 자연스러움, 그 스스럼없음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씻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일요일이라 부르고스에는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았었고, 나머지 길에는 가게라고는 없었던 지라 저녁을 먹지 못했던 우리는, 그때까지 문을 연 술집을 찾아 들어갔다. 티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글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나는 천지인 방식으로 모음을 설명하고 영어 발음 기호로 자음을 표시한 다음,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티로는 30분 만에 한글 읽기를 마스터했다. 그 뿐 아니라, 내가 그려준 태극기를 보고 잠시 생각하더니, 흥분해서는 주역의 괘를 그려 가며 모음에 숨어 있는 음양오행의 이론을 되려 내게 설명했다. 다른 날도 그랬지만, 그날 티로는 정말 장난끼 많은 소년과 제대로 생각 깊고 진지한 어른 사이의 어느 지점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나와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오늘은 낮잠을 세 시간이나 자는 바람에 애매해졌다. 일은 많고 잠은 계속 쏟아진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되돌아 갈 수는 없으니, 그냥 하나하나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는 거다. 혼타나스로 가던 그 날 밤에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 지루하고 아주 가끔씩은 역겹기까지 한 사람들을 하루하루 견뎌내는 것'을 신이 내게 숙제로 내주셨나 보다 싶어서 겸허하게 받아들이다가도, 이건 숙제가 아니라 숫제 천벌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남들도 다 서로 섞여서 참고 살고 있는데 너는 왜 못하냐고 묻는다면, 나도 예전에는 곧잘 참고 잘 살았었다고 말하고 싶다. 너나 없이 다 그랬고, 그래야만 했고, 그게 당연했으니까.

사람 변하는 게 어디 쉽나. 나는 여전히 3년 전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역겹고 가끔 지루한 일인이지만, 그때와는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부터, 나는 나의 비겁함과 다른 이들의 이중성을 더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 틈에서 조밀하게 짜여진 바쁜 일상을 매일 견딘다는 건 스페인 시골길을 혼자서 매일 하루에 40km를 걷는 것보다 훨씬 재미 없고 힘들고 지루하고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까미노를 완주했을 때는 그걸 했으니 이제 뭐든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지금은, 이 강도 높은 지루함을 잘 견디기만 한다면 산티아고에서 서울까지 기어서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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