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풀, 데인저러스 메소드와 함께 조울증자에게 용하다는 기사를 본 터라, 합숙 교육 끝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친구와 함께 극장으로 갔다.

100% 몰입하게 하는 완전히 훌륭한 영화였다. 할 말은 많지만, 시간이 없는 관계로 일단 교육 기간 동안 있었던 일들과 멜랑콜리아를 엮어서 쓴 글을 긁어서 그냥 붙이려고 한다. 영화를 같이 본 친구 말이, 감독인 라스 폰 트리에는 우울증 전력이 있는데, 이전에 만든 영화들보다 많이 정제된 것 같다고 한다. 그전 영화들은 좀 그랬다고. 

어쩐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담담하고 적나라할 수는 없을 듯.

 

아래는 가입해 있는 타로 카페에 쓴 글. 그날그날 카드를 열어서 미리 예측을 한 다음, 저녁에 하루를 돌아보면서 예측의 정확도를 맞춰보고 있다. 예수살이 교육을 마치고 나서 바로 멜랑콜리아를 본 다음날 아침에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카페에 긴 글을 올렸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매주 일요일은 물론 평일에도 주 2-3번씩 성당에 나가고 있으며 천주교에 아무런 불만이 없다. 교육에도 아주 만족하고, 교육 기간 중에 선량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돼서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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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부터 살짝살짝 아침에 카드를 열었다가 저녁에 정리를 하고 있죠.

어찌어찌 3박 4일 교육을 가게 됐는데, 거기가 천주교에서 진행하는 거라서(하하!) 타로 카드를 가져가면 안 될 거 같아서 음..어떻게 하나..생각하다가 교육 들어가는 날 아침에 4일치와 전체 운을 미리 열어서 간단히 예측을 정리해 놓고 교육 갔다가 어제 왔습니다.

그 예측대로만은 안 될라고 아둥바둥 기를 썼지만 세상은 역시..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겠지만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랑은 정반대로 돌아가죠. 

 

카드는

7일 교황, 검의 기사, 검 3
8일 심판, 검의 여왕, 검 10
9일 황제, 펜타클 왕, 검 4
10일 연인, 완즈 왕, 완즈 6
종합 별, 검의 왕, 검 5

 

교육 전에 적은 한 줄짜리 초간단 예측 : "칼이 난무하는.. 뭔가 대단한 이론을 가져올라나? 결국 지나? 그러나 반짝반짝 빛나는."

교육관에 들어서면서 '쥐뿔 아는 것도 없는 내가 논리를 칼처럼 휘둘러 봤자 피차 상처만 주게 되니 말을 아끼고 조용히 있다 오자'는 아름다운 삶의 태도를 견지하려고 하였으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극적 반전을 거듭한 끝에.. 미리 열어 본 대로 된 거 같습니다.  

 

연인 카드는 잘 예측이 안됐지만, 일단 교황 심판 황제 카드가 좀 심하게 센 거 같아서 정말로 정말로 겸손 모드로 가려고 마음을 정하였으나. 농담 아니라 교육 기간 내내 진짜 재수 없게 굴게 되었습니다.(다들 어찌나 신심들이 깊으시고 착하신지, 저도 모르게 자꾸 삐뚤어지더라는.)

급기야 한 분으로부터 "자기는 교리를 도대체 누구한테 배웠어?"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칼 10개를 꽂아주신 분으로 당첨.

셋째날에는 자포자기하여 될대로 되라, 각자 살고 싶은 대로 살자 모드로 가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걸 또 밤에 있었던 고백성사 시간에 신부님이 콕 집어 내는 거죠. "자기 안에 벽을 쌓고 있어요...브라브라브라... --" 검 4 당첨.

네쨋날까지 서로들 조금씩 신경 거슬리게 하는 모드는 이어졌죠. 1:多(피교육생&진행&성경&찬송가) 다구리 모드로. 물론 저는 끝까지 저항하면서. 예를 들자면 마지막날 교육의 모토를 담은 성경문구는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그대들과 함께 있습니다" 였는데, 거기 대한 저의 답문은 "같이 있어 준다고 했지 도와 준다고는 안했다"(정범균 버전) 뭐 이런 식으로.

 

예수님 닮기 하나도 안 어렵네, 어른들한테 싸가지 없이 한 건 쫌 미안한데... 뭐 등등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교육을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진행자가 오더니 제가 동기 부대표로 뽑혔다고 하더군요.(동기 대표단을 동기들이 뽑는 게 아니고 진행자들이 뽑는 이런 전대미문의 똥같은 경우를 보셨나요?) 정말 진지하고 강경하게 "저는 개인 사정으로 맡을 수 없습니다.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고 믿음도 없습니다. 딱 5분만 생각할 기회를 주세요." 하고 말하고 있는데 앞에 선 신부님이 대표단을 뽑았고 본인들의 동의를 구했다, 누구누구다, 하고 이름을 확 불러 버리는 거죠. 이 상황에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저는 동의한 적 없는데요" 하고 마지막으로 찬물을 확 끼얹을 기회가 있었는데 이성적으로 '그래도 신부님인데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주면 안되지' 를 선택해 버렸습니다. 젠장, 이게 연인 카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육 전에 열어서 본 카드들이 빙글빙글 맴돌더군요.

타이어도 몇년만에 한번씩 앞뒤좌우를 갈아줘야 하는 것처럼 저도 반생 동안 썼던 것들은 쉬게 하고 쉬던 것들을 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숨소리도 조심하면서 살려고 하는 저한테 이렇게 비수를 스물 다섯개나 내리 꽂으시다니.

왜 이러세요.. 저한테 왜 이러세요..정말 왜 이러세요... 하다가 나중에는 버럭 "정말 저한테 자꾸 왜 이러시는 거예요?" 하게 되더라구요.

 

교육 끝나고 나서 미리 예매해 두었던 영화를 봤죠. 제목은 멜랑콜리아.

이제 곧 내릴 거고, 본 사람도 많이 없을 거라서 간단하게 내용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멜랑콜리아는 저 멀리서 아름답게 빛나는, 붉은 색을 띄었다가 푸른 색이 되기도 하고,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도 하는 별(아마도 혜성?)의 이름이죠. 

각종 이론과 계산에 밝은 과학자들은 그 별이 지구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갈 거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천체망원경으로 우주 쇼를 즐기다가 나중에는 불안해 하다가 다 죽습니다. 멜랑콜리아가 지구에 와서는 콩 하고 받거든요.  

 

3박 4일 동안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언제나 그랬기는 했지만, 개인 사정상 잠시 까먹고 있었는데, 잘 살려고 애쓰면 애쓸 수록 참혹한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

제가 원래 굉장히 무례하고 욕도 잘하거든요. 그래서 웬만하면 사람들도 안 만나고 만나게 되더라도 꼭 필요한 말만 하려고 하는데 그걸 좀 참으면서 나름 예의를 지키려고 노력했더니 이렇게 됐습니다.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게 저한테는 맞는 거 같습니다.

이제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도 없지만.. 타로 카드를 가져갈 걸 그랬어요.........

 

길 잃은 어린 양 하나 어떻게든 구해 보려고 애쓰시는 것 같은데, 제가 졌소이다(검 5). 니 맘대로 하세요. 꼭 잘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 from 멜랑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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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몇몇 좀 심한 표현들은 살짝 바꾸거나 지웠는데, 그래도 혹시 상처 받으셨다면 다시 이 곳을 찾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리스도교인으로서 타로를 가지고 노는 것에 대한 입장은 다음에. 일단, 금기를 깨는 즐거움에 중독된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멜랑콜리아, 스타, 죽음으로 몰고 가는 치명적인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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