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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이 지나서 새로운 마음으로 블로그에 들어올 때마다 참담하다. 

지난 이야기들을 왜 이렇게 힘겹게 써 내려가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고서는 글을 이을 수 없다. 


이 땅에 왜 왔는지 기억하는 것, 어떤 때 마음껏 행복했었는지 기억하는 것, 힘들었던 시간들은 어떻게 건너 와서 지금 웃고 있는지 기억하는 것. '기억'은 내 삶의 화두다. 

그런데, 슬프게도 나는 기억력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기억해야 할 것들은 기억으로 남지 않고 

기억하려고 노력한 적 없는 의외의 것들만 기억 창고에 수북하다. 

그래서 나중에 나중에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항상 뭔가를 남겨야 한다. 

그런데 나는 '선행과제 선결 편집증'이 있다. 

그래서 7년 전 이야기를 지금도 쓰고 있다. 딱한 일이다. 

그래야 한다면 그래야겠지만, 죽을 때까지 지나온 일들을 기억한답시고 띄엄띄엄 쓰다가 '오늘' 한번 못 살아보고 생을 마감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한숨이 나온다. 


2010년 4월 7일, 31일째 되는 날이다. 

메르카도이로의 알베르게에서 안내문을 보니, 적당한 거리의 난방 되는 알베르게를 가려면 26km 이상을 걸어야 했다. 26km를 걷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뒤에 있을 것이 확실한 티로를 생각하면, 길을 서둘러 갈 이유가 없었다. 포르토마린에서 은행도 가고, 우체국도 가고 시간을 보내다가 가까운 곳에서 멈추기로 했다. 


길 위에서 한 달이 넘었건만, 자연의 경이로움은 여전하다. 나는 해가 뜨기 전의 차갑고 푸른 색을 좋아한다. 한참을 멈춰서서 짙은 색 하늘이 옅어지는 순간을 즐겼다. 


포르토마린에 호수가 있다던가? 그래서 그런지 드라이아이스 같은 구름이 얕은 골짜기에 그득그득 담겨서 이리로 저리로 흐르고 있었다. 




포르토마린은 큰 곳이었다. 도시 입구를 들어설 때 '아 예쁘다!' 했었는데 보시다시피 사진은 이렇다. 꽤 유명한 휴양도시라는데 심하게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도심의 인터넷 까페에 들어가서 티로에게 내 계획을 설명하는 메일을 쓰는데, 한심했다. 이렇게 하기로 했다가 저렇게 하기로 했는데, 일이 이렇게 돼서 결국 어떻게..  하고 쓰다 보니,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고 결론만 말하라며 꾸짖던 티로가 옆에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너는 어쩌면 그렇게 늘 신중하니?" 라고 물었을 때 티로는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나도 마음 속은 복잡해. 하루에도 몇 번씩 이랬다저랬다 한다고. 그래서 확실히 생각을 정할 때까지는 말을 하지 않아. 그리고, 일단 말을 하면 그걸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이야." 라고 말했었던 것이 문득 기억난다. 


이 날은 짧게 걸었지만 많은 역동이 일어났다. 

포르토마린을 나와서 한동안 혼자 걸었다. 높지 않은 언덕 몇 개를 지난 것 같다. 

길에서 쟝 할아버지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영어가 서툴러서 단어들만 몇 개 나열하는 식이었지만, 나는 그가 보르도에서 왔고, 71세라는 것 등을 알 수 있었다. 대화가 잘 안 되는 사람과 속도를 맞춰서 걷는 것은 고달픈 일이다. 걸음이 느리면 그만큼 걸어야 할 시간이 늘어나서 더 그렇다. 

한동안 같이 걷다가 드디어 장 할아버지가 먼저 가라며 손짓을 했다. 나는 느리게 걷는다고 걸었는데, 할아버지한테는 힘에 부친 것 같았다. 잘됐다 싶어서 작별인사를 하며 껴안는데, 살짝 입냄새가 났다. 재빨리 떨어지려는데 쟝 할아버지가 메르시...꼼빠냐.. 하며 그나마 알아 들을 수 있는 프랑스 말로 인사를 했다. 동반자? 같이 걸어줘서 고맙다는 거 같았다. 

할아버지와 헤어져서는 원래의 내 속도대로 길을 걷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같이 걸어준 게 뭐가 고맙다고... 그깟 게 뭐라고 그거 하나 못 해 주고 내쳐 앞질러 온 건지. 

앞으로 평생 볼 일도 없는 분인데. 다시 기억하게 될 때는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 때는 미안했어요, 할아버지. 


그리고 그 날 이후 지금까지, 나는 앞에 어르신이 걸어가시면 앞지르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쟝 할아버지와 헤어져서 걷는데, 앞에도 뒤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새삼 쓸쓸했다. 어차피 혼자 걷기로 하고 간 길인데, 기분이 묘했다. 

9시부터 걷기 시작해서 짧게 17~18km 정도를 걷고 오후 4시에 일찌감치 벤타스 데 나론에 도착했다. 

하필 그 날 묵은 알베르게에는 컴퓨터도 없었고 전화도 없었다. 

로자와 그 마을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 같다. 마을에 알베르게는 단 두 개이고 그나마 난방이 되는 곳은 내가 묵은 곳인데, 늦도록 로자는 오지 않았다. 

까미노의 순례자들은 서로 만나서 어떤 약속을 했더라도 서로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보자' 라고 약속해 놓고 거기서 못 만나게 되더라도 별로 화가 나지 않는다. 수많은 가능성과 변수들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다치지 않았기를, 병나지 않았기를 조용히 바랄 뿐이다. 


벤타스 데 나론의 알베르게에는 밤 9시가 될 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마도 혼자 있었던 것 같다. 

그 날의 수첩은 "산티아고가 무섭다. 못 가겠다. 두려움을 떨치고 조금씩, 조심스럽게" 로 끝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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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젠장. 


한 걸음 한 걸음씩, 우리는 나아간다. 

pas a pas, se va luen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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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젠장. 

라비린토스를 읽던 어느 날에도, 2019년이 된 지금도. 

한 걸음 한 걸음씩 우리는 나아간다. 

Posted by 微物의 숨소리

아 또 시간이 이렇게 갔네. 도대체가 따라갈 수가 없구만. 작정하고 따라가는 건 아니지만. 아래는 열흘도 더 전에 저장하고 내팽개쳐 놓았던 글. 기억과 시간이 서로 섞여 정신분열증을 일으킬 듯.  



원래 이 글의 제목은 "칼보르-페레이로스와 포르토마린의 중간 마을(30)" 이었다. 

수첩에 '페레이로스와 포르토마린 중간, M something' 이라고 적혀 있었고, 생장피드포르에서 얻은 A4 한장 짜리 숙소 리스트에는 아예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록을 시작하면서 '이 마을 이름을 알려면 다시 가는 수밖에 없겠다'며 포기하고 있었는데 사진 속의 알베르게에서 마을 이름을 발견했다. 확인을 위해 검색을 해보니 그런 마을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기쁜 날이다. 뜬금 없지만 일단 기쁨의 글 한 편. 


낮과 밤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삶에서 꽃향기나 달콤한 허브향이 나고, 날마다 더 활기차고 더 반짝이며 더 영원하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이다. 모든 자연이 당신의 기쁨이니, 시시각각  신의 축복과 감사를 느낄 것이다. 생활 속에서 내가 거두어 들이는 진정한 수확은 아침저녁의 어슴푸레한 빛처럼 손에 잡히지도 않고 설명할 수도 없다. 내가 움켜쥔 것은 우주의 먼지요, 한 조각 무지개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루이스, 로자와 함께 했던 4월 5일 저녁은 정말 유쾌했다. 그들에게서 받은 긍정 에너지가 까미노 막판의 이상한 우울증을 한방에 날려주었다. 루이스가 부활절 행렬을 재현할 때는 웃다가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오만 가지 이야기 끝에 티로한테 줏어 들은 이야기들-명상이 정말 중요하다더라. 우주와 튜닝하는 거라더라 -을 하니 루이스는 진지하게 "스페인에도 명상을 하는 전통이 있어."라고 했다. 놀다놀다 지쳐서 잠드는 민족이 무슨 명상을? 처음 듣는 이야기라 귀를 쫑긋 세우며 스페인에서는 명상을 어떻게 하는데? 하고 물으니 그는 "흔히들 스페인 명상법을 '시에스타'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랬다. 그런 식이었다. 


하루에 백만 가지 이상의 우연이 만나서, 같은 알베르게에 들어서기 직전까지 어디서 어떻게 굴러먹고 살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5분도 안 지나서 전생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처럼 무턱대고 믿고, 의지하고,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한다. 그 날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웃고 울고 떠들고 먹고 마시다가 서로에게 남은 길을 기쁘게 축복한다. 까미노에서는 매일 매순간 일어나서 놀랍지 않은, 그냥 그저그런 수준의 당연한 기적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 밤이 기적)



110km 남았단다. 사나흘을 꼬박 걸어가야 되는구만 어찌된 일인지 산티아고가 바로 코앞에 있는 것 같다. 알았어. 알겠다고. 까미노 끝나가는 거 알겠으니까 그만 좀 말하라고. 남은 거리가 줄어들수록 심장이 타들어갔다. 


죄다 전날 사리야로 갔겠지. 최대한 걸음을 늦추어도 하루에 따박따박 20km씩은 걷게 되면서, 날로 시름이 깊어지고 있었다. 매번 일부러 까미노 바로 옆의 알베르게에 묵었고, 저녁 내내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는데. 티로를 못만난 채로 아침에 혼자 알베르게를 나설 때는 어제 하나를 덜 갔어야 했나, 아니면 하나를 더 갔어야 했나 하며 전날의 모든 선택과 결정을 애꿎게 원망했다. 


이 날은 종일 사진을 일고여덟 장밖에 안 찍었다. 뭘 더 하고 싶겠어. 산티아고까지 110km 남았다는 표지 보고 의욕이 생기기는 커녕 더 슬퍼진 순례자는 나밖에 없을 듯. 


그간 성당은 수도 없이 봤지만, 티로가 설명해준 양식대로 만들어져 있는 성당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저 정도면 병이 깊었다고 봐야지. 


가다가 멈춰 선, 유리문의 선팅 덕에 마을 이름을 알게 된 바로 그 알베르게. '길가에 있는 여행자 숙소 겸 바' 비즈니스 모델은 그때 이미 내 무의식을 점령했던 것 같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알베르게가 까미노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남들이 다 간다는 포르토마린을 눈앞에 두고 저 알베르게에 멈춰 섰다. (사실, 그날(4/6) 아침 수첩을 보면 그날의 목적지는 포르토마린이었다. 그곳에서 할 일들을 빼곡하게 적어 놓고는 나몰라라.)  

걷는 속도를 더이상 늦출 수는 없었다. 그러니 길 위에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려면 아쉽건 말건 기운이 펄펄 넘치건 말건 딱 멈추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날(4/6)은 종일 로자와 걸은 걸로 돼 있다. 수첩을 보니, 전날 만난 루이스와 로자에 대해 티로를 둘로 나눠 놓은 것 같다고 설명돼 있다. 비올라와 피아노를 능숙하게 다루는 루이스, 명상, 동양, 테라피에 관심이 많은 로자. 

로자는 사이코 테라피스트라고 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심리 상담가다.


지금부터 아래는 오늘(2016/5/22) 쓰고 있는 글. (아.. 이건 제정신 가진 사람이 하는 짓이 아니야.. 그래도 한줄한줄 쓸 테다. 기억력 없는 나를 위해.)  


4월 6일 저녁에 쓴 수첩에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추정되는 어설픈 짐작이 있다. 

예를 들자면, '여기서 이 시점에 심리상담가를 만난 것은 아직 남은 문제를 그와 함께 풀어 보라는 신의 계시다' 뭐 이런 식. 

티로가 스페인식 R 발음 못한다고 엄청 뭐라 한 직후에 발성 전문가인 신디를 만났었다. (티로는 내 R 발음을 가지고 처음에는 무지하게 놀리다가 나중에는 화를 냈는데, 내가 구강구조를 탓하니까 그건 순전히 내 게으름 때문이라고 맞받아쳤었다.) 여튼.

판초를 잃어버렸을 때, 하필 그때 바로 옆에 있던 성진이 자기가 갖고 있던 여벌의 판초를 나눠 줬었다. 

정말로 필요하다고 느끼면, 또는 정말로 필요하면 그게 사람이든 뭐든 어김없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니, 뭔가가(또는 누군가가) 눈앞에 딱 나타났다는 것은 내가 그 시점에 그것(또는 그 사람)을 절실히 원했기 때문인 걸로 끼워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쓰다보니 이런 식의 끼워맞추기가 나중에 문제가 된 것 같다. 나의 경험이며 나의 진실이며 나의 주장인 것을 다른 이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게 된 것.)


다시 여튼. 

수첩에는 산티아고에 가서 할 일들이 적혀 있다. 

순례자 사무실 가기, 파라도르 예약하기, 로마행 비행기 예약하기, 기념품 사기, 엽서 보내기 등.


그리고 뭐라도 된 양 수첩에는 "씻고 성경 읽고 명상하고 자자" 라고도 써 있다. 지가 언제부터 그랬다고. 나원참. 


이 날 하루 일을 기록하는 데 물경 20일이 넘게 걸렸다. 젠장.

Posted by 微物의 숨소리

나 정말 어떻게 됐나보다. 미쳐 가고 있는 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도 되나 몰라. 


라고 쓴 건 사흘 전인 2016년 4월 25일. 그리고 이어서 아래에 띄엄띄엄 써내려가고 있는데 이게 대체 언제 끝날지. 오늘은 2016년 4월 28일. 티로가 만으로 쉰 살이 되는 날이다. 6년 전이나 지금이나, 리듬이 불규칙한 몸은 어떻게 알고 다시 반응 중이다. 


당시(4/4)에 묵었던 폰프리아의 알베르게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대로 쓰러져 잔 모양인지, 사진도 일기도 없다. 정황상 페드로를 그 곳에서 다시 만난 것 같다. 페드로에게 이런저런 순례자들의 소식을 들었고, 아침에 같이 걸었다. 샤나도 만났다 하고, 애니도 만났다는데 티로 이야기는 없었다. 도대체 누구랑 어디를 걷고 있는 건지. 혼자 걷는지, 다른 사람을 만난 건지. 


알베르게는 기억나지 않는데, 그곳을 나와서 4월 5일에 걸었던 길은 또렷이 기억난다. 일단, 화살표와 표지들이 전과 달랐는데, 봐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갈림길에서 헤매다가 비닐 리본이 나풀거리고 있는 길을 택했다. 갈림길에서 나처럼 망설이고 서 있던 페드로에게 "저 표시가 있으니 이 길이 확실해"라고 했더니 페드로도 나를 따라 왔다. 

그 후 한 30분을 같이 걷는 동안 심장이 쪼그라드는 줄 알았다. 길이 점점 좁아지고 험해지더니 급기야 개울에 이르러 표지가 끊어져 버렸다. 우리를 인도했던 비닐 끈 표지는 까미노 알림용이 아니라 접근 금지용인 것 같아보였다. 아니, 실은 개울을 맞닥뜨리고 나니 그제사 한눈에 봐도 딱 그랬다. 반대편 개울 옆에도 비닐 끈이 묶여 있었다. 우리는 돌아갈 건지 절대로 까미노가 아닌 것 같은 그 길을 계속 갈 건지를 정해야 했다. 

29일차. 이때 쯤이면 걷기에 이력이 나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 걸음 한 걸음이 힘겨운 건 마찬가지기 때문에 길을 잘못 안내하는 것은 엄청난 민폐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걸어가 버렸다고 판단했는지, 페드로가 개울을 건너자고 했다. 

개울을 건넜는데 길은 계속 젖어 있었다. 철벅거리면서 물길인지 사람 길인지 모르는 길을 앞서 걷는 페드로를 보니 진심으로 미안했다. 

"뒤에서 보니 너 꼭 물 위를 걷는 거 같아. 예수님을 보는 느낌이야. 이 길이 까미노가 아니면 혹시 나 때릴 거니?" 라고 시덥잖은 농담으로 미안함을 덜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다른 한국인 순례자로부터 페드로가 말도 못하게 까칠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은근히 겁도 났다. 의외로 페드로는 한 마디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앞장서서 걷는 모습을 보니 더 미안했다. 

한참을 걸으니 낯익은 표지들이 보였다. 다시 까미노 위로 올라 선 것이다. 동네 바에 들러서 물에 젖어 축축한 양말을 잠깐이라도 말려야 했다. 그때까지 페드로가 동행해 주었다. 엄청난 개인주의자인 줄 알았는데 늘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다른 순례자들의 평판 때문에 안 좋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레니에 대해서도 페드로는 전혀 다르게 설명했다. 진은 그가 너무 성가시게 하고 눈치도 없다고 했는데, 페드로는 그가 음식을 만들어서 나눠 먹는 것을 좋아하고 유쾌하다고 한다. 어느 누구도, 직접 겪기 전에는 모를 일이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린 청년으로만 보였던 그가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워졌다. 우리는 메일 주소를 교환했고, 그후로도 많은 시간을 함께 했으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와서는 페북 친구가 되었다. 


사모스는 가깝다 싶고 사리야는 멀다 싶다 싶어서 아침에 고민을 좀 한 것 같다. 페드로와는 어디서 헤어졌는지 모르겠다. 사모스를 지나쳐서 사리야로 향하다가, 2km 쯤 남은 곳에 덩그러니 하나 있는 커다란 알베르게에 들어갔다. 잔디밭도 있고 헬스 기구도 있고 피아노도 있는 곳이었다. 저녁이 되어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길래, 크고 좋은 집에서 혼자 자게 될 줄 알고 엄청 흥분했었는데 밤에 한 명이 찾아왔다. 팜플로나의 까미노 옆에 집이 있어서, 매일 집을 나서면 즉각 순례자 모드로 돌입하게 된다는 루이스였다. 

이 날은 어울리지 않게 혼자 진지했던 것 같다. 수첩에 있는 내용을 옮겨 적으려고 보니 낯뜨겁다. 


비껴 가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고. 그것이 인생이다. 

까미노 길은 하나지만 그 길에서 경험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화살표를 따라 자기만의 길을 가면서 자기만의 화살표를 그리고, 결국 하나의 화살표가 된다. 

그리고, 어떤 화살표들은 뒤따라 걷는 사람들을 안내하기도 한다. 


낮에 물 위를 걸을 때, 처음에는 한 발만 적시려고 노력했는데, 너무 힘들었다. 

두 발을 푹 담가서 다 젖고 나니 몸도 마음도 편해졌다. 

내게는 너무 특별한 길. 

한두 명은 나타날 법도 한데 아무도 오지 않는다. 

다들 어디로 간 건지. 게을러졌나. 

폰페라다와 라바날의 알베르게가 벌써 기억나지 않는다. 

좀 자세히 적어둘 걸 그랬다. 


그 다음날인 4월 6일에는 괜히 일찍 깨서는 아침부터 끄적거려 놓았다. 아 귀찮아. 뭐가 잔뜩 쓰여 있다. 그냥 버리자니 좀 아깝다. 아래에, 다음날 아침 사진이 시작되는 곳에다 옮겨 놔야겠다. 

 

아래 위 사진은 폰프리아 알베르게를 나와서 만난 낯선 표지들. 이 길이 그 길이 맞다는 건지, 어느 길로 가라는 건지. 



발 디딜 곳이 마땅치 않은 곳. 어떤 길은 10cm 이상 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 위를 걷는 기분이 어때? 하고 페드로에게 농담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덜덜 떨었던. 




아래는 칼보르에서 묵었던 사립 알베르게. 깨끗하고 고급스러웠고, 비쌌다. 도착해서 씻고 옷 갈아 입고 여기저기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지금(20170223) 보니, 창문 너머로 멋진 석양을 볼 수 있는 저 곳, 너무 멋지다. 일에서 돌아온 남편이 아내와 신혼인 것처럼 키스하는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난다. 옛날옛날에는 그랬겠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살아 돌아오기가 쉽지 않았을 거야. 하긴.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티로는 방명록을 보지 않는다. 티로처럼 처음에는 쓰지도 않고 보지도 않던 나는, 언젠가부터 고집스럽게 방명록에 각종 고백을 털어놓고 있었다. 나중에 들었는데, 티로도 며칠 뒤에 이 알베르게에 묵었었다고 했다. 그리고 잠깐 미쳤었는지 방명록을 봤다고 했다. 누군가 그에게 방명록 내용을 전해 줄 거라 생각했지 직접 볼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여러 모로 쪽팔리는 일이다. 나중에 만난 티로는, 그때 니가 사랑에 빠졌다는 사람이 자기냐며 물었었다. 그걸 몰라서 묻냐, 이 바보 멍텅구리 변태 자식아. ㅠ

그 때 벌써 미쳐 있었군. 난데 없이 웬 4월 10일.

이 자료 저 자료를 다 뒤져도 칼보르에 도착한 때는 명백히 4월 5일 저녁이었구만. 다음날 아침에 방명록을 썼다 해도 4월 6일 화요일이거든. 그리고 4월 6일이 화요일이면 4월 10일은 토요일이거든. 

동양에서 온 미친 여자가 자기를 덫에 걸리게 할 거라더니. 그 때 이미 정신이 우주 밖을 헤매고 있었던 듯. 생각해보면 여자는 명백히 나인데.  덫에 안 걸리고 가기도 잘도 갔다. 

여튼. 





사람들이 죄다 미친 듯이 달려가는 사리야 바로 코앞이라 한가한 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왜 까미노를 하겠다고 결심해서 이 고생인지

야곱은 왜 산티아고에 묻혀서 우리를 그리 가게 하는지

아무개는 왜 확실하지도 않은 무덤을 야곱 거라고 했는지

별은 왜 아무개를 인도했는지

처음 10일, 진짜 모두를 원망하면서 걸었습니다. 

그 다음 20일은 30km, 40km씩 걸으면서 매일 밤 "i did it!", "i made it!!"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산티아고로 가는 걸음을 늦추고 있습니다. 

인생이랑 비슷한 거 같아요. 

후반 3분의 1을 깨달음의 길이라고 한다더니, 정말 매일매일 느끼고 있습니다. 

늘 감사하며, 더 많이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camino, a miniature of normal life.

i didn't know why i was here,

i fell in love with someone, and broke up, 

i did something eagerly, 

i was disappointed with myself, 

i found what i was, and began to love myself. 

thank you god, who let me be here on camino.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이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도중에서 만나를 지고. 


그때는 뭔가 한껏 충만했는데, 6년 지나니 소용 없더라. 다 닳아 없어져 버리더라. 살도 다시 찌더라. 

여튼. 카메라에 기록된 시간들을 보면 아래 사진부터는 그 다음날인 4월 6일이라야 말이 된다. 창문밖 풍경이 굉장히 볼만 했는데, 역시 나는 다른 것도 못하지만 사진에는 더더욱 재능이 없다. 




4월 6일은 일기가 길다. 이래저래 골라 쓰기 귀찮으니 칼보르의 알베르게를 떠나기 전 새벽에 쓴 것은 아래에 옮긴다.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 있었던.


어찌어찌하다가 일찍 깨 버렸다. 

700km를 걸었더니 70살이 된 것 같다. 

길 위의 사람들이 관대한 이유는, 까미노가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죽는다는 것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세상 사람들은 왜 그럴까?


포르토마린에서 할 일. 

사리야 지도 구하기

엽서 써서 우체국 가기

은행 입금 확인 

친구들 및 가족들 전화

환전


까미노는 인생을 축약해 놓은 것 같다. 

왜 왔는지 이유를 모르는 채로 와서는 불안 속에 시간을 보내고, 왜 하는지 모르는 일을 열심히 하고, 

만나고 헤어지고 질투하고 사랑하고 깨지고 아파하면서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생각하게 되고 발견하게 되고,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었을 쯤이면 끝이 얼마 남지 않은.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시간을 늦추고 싶어지고, 더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는, 다음날 티로에게 보낼 메일에 쓸 내용들이 적혀 있다. 그 내용을 다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에 띄는 것은...


어떤 이가 이 길을 간다고 했더니 한 지인이 곧 죽게 된다고 해도 지금 그 일을 할 거냐고 물었다고 했다. 그는 그러겠다고 하며 길을 나섰다고 한다.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메일을 보내기로 한다. 

빨리 도착하건 늦게 도착하건 14일까지는 피네스테레에 있을 예정. 

15일에는 산티아고로 돌아가서 파라도르에서 묵고 16일에는 로마로. 

18일부터 24일까지는 아무 일정이 없다. 

남쪽으로 갈지 동쪽으로 갈지. 

하루에 15km씩만 걸어서 월요일에 산티아고에 가려고 하는데, 그렇게 될지 어떨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언제 도착을 하건 피네스테레에서 14일까지는 있으려고 한다. 

메일 안 본다는 거 알고 있다. 

집에 돌아가서 보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보낸다. 



4월 5일 밤 늦은 시간에 로자라는 스페인 여자가 숙소에 도착했다. 젊은 남자와 단둘이 한 방에서 자게 될 줄 알고 내심 이게 웬 떡인가 싶었건만. 


우리 셋은 서툰 영어로 밤 늦게까지 웃고 떠들고 놀다가 다음날 아침에 같이 숙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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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치를 이틀에 걸쳐 연속으로 기록하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다. 그러니 제대로 하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글쓰기'로 나를 이끌어 간 친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몇 달간의 내 우울이 지구 반대편까지 건너갔는지, 맨체스터에 있는 Mark가 글을 써보라고 권했다. 


이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아침에 다시 보니 어제 수첩을 잘못 해석했다. 

루이테랑에서의 대화 아랫 부분과 Jean Pierre, Andre 사이에 있던 '4월 4일. 28th' 를 못 보고 지나쳤다. 그날의 기록이 많지 않다 보니 묻어서 전날 일들과 뭉쳐져 버렸다. 뭐, 중요한 건 아니지만. 

여튼 장 피엘이랑 앙드레는 그 다음날 만난 게 맞다. 

그리고 4월 3일의 기록 중 중요한 것을 빼먹었다. 아스토르가에선가부터 만났던, 직업도 뭣도 말하지 않던 수정씨가 자기 연락처를 내 수첩에 남겼다. 문득문득 보고 싶어지는 사람.  


지금 생각하니, 루이테랑을 나와서 고도가 가장 높다는 어느 지점(오세브레이오)에서 장 피엘과 인사를 나눈 것 같다. 이날은 간만에 25km를 걸었고 등산을 해서인지 건질 만한 게 남아 있지 않다. 

어쩌면 이렇게 기억 나는 게 하나도 없지? 오세브레이오의 번잡한 상점들만 생각난다. 사진을 봐도 도통 모르겠다. 1년이 통째로 날아간 느낌이랄까. 이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그 날의 사진들을 뒤져보며 드는 생각은, 다음번에 만약에 기회가 되어 다시 길을 걷는다면, 사람들이 잘 멈추지 않는 작은 마을에 가고 싶다는 것. 예를 들어, 그 날 지나쳤던 아래 같은 곳들. 







단언컨대 이 사진 안에 뭐 있다. 그게 도대체 뭔지 모르겠네... 뭔가 의례를 한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급 흥분한다는 갈리시아 표지. 나는 죽을 날 받아 놓은 사람처럼 우울하기만 하구만. 다들 내 맘 같지 않은 듯.




중요한 건!! 이 날, 즉 2010년 4월 4일, 수첩에 뜬금포도 아니고 Jung 이라고 적혀 있다는 거다. 융이 아니라 정인가? 중인가? 뭔가? 대체 무엇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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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그 때 하루가 1년처럼 지나가더라니. 하루를 기록하는 데 꼬박 1년이 걸리고 있다. 

그러니, 나는 제대로 하고 있다. 

미리 들춰본 6년 전의 4월 21일에 나는 참 행복했다. 이 추세라면 15년 뒤에야 기록되겠지만. 

지금은, 매달 한 통의 이별 편지를 쓰고 있다. 


사진을 보고 있자니, 당연한 말이지만 마을 이름과 풍경이 낯설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 여기, 여기선 이런 일이 있었지' 했었고, 알베르게의 화장실이며 침대가 놓여 있던 거며 다 기억 났었는데. 



2010년 4월 3일은 길을 걸은지 27일 되는 토요일이었다. 

길을 걷다가, 걸음이 빨라서 훨씬 더 멀리 갔을 것으로 생각했던 마르셸을 만났다. 


어쨌건. 

티로는 뒤에 남겨져 있고, 남은 길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내심 최선을 다해서 천천히 걸어가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15km 쯤만 걷고 멈추고 싶었는데, 아무리 천천히, 아무리 놀면쉬면 걸어도 20km 이상은 계속 걷게 되었다. 

이 날은, 돌아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있다. 

"공부를 한다면? 여성학 사회학 철학 역사..." 등등의 리스트 아래에 주역, 불교가 있는 것이 흥미롭다. 


루이테랑의 알베르게에서는 직전 마을에 묵을 것으로 생각했던 엘렌과 디니 모녀를 만났다. 

걷는 동안 느낀 거지만, 누가 어디에 있을 거라는 예상은 늘 빗나간다. 


지금은 내가 거기를 대체 왜 갔는지 완전히 까먹었지만, 그때는 이렇게 써 있다. 


이제 알 것 같다. 여기까지 왜 왔는지. 

굳이 여기까지 와서 흔적을 남긴 성 야곱을 원망하면서 걷던 초반을 지나고 

뒤에 남겨지기 싫어서 30-40km씩 강행군을 하던 중반을 넘고 나니 지금은 오히려 걸음을 늦추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분홍신이 미쳐 날뛰고 있다. 

지금 생각으로는, 그날 걸을 분량을 이미 다 걸었다면 단 한 발도 더 갈 수 없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춥고 피곤하고 지쳐서 막 알베르게에 도착했더니, 바로 다음 마을에서 예수가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절대 못 간다에 내 남은 온 시간을 걸 수 있다. 


이 때쯤 순례자들 물갈이가 있은 모양이다. 

동네 벽이나 표지판에 스페인 이름보다 영어식 이름이 더 많이 눈에 띄었다고 써 있다. 

진작부터 써온 친구들은 쓰다 지쳤거나 중간에 돌아갔을 것이고, 새로 온 아이들은 들뜬 마음에 계속 흔적을 남겼을 테지. 


이 날은 3시가 되기 전에 루이테랑에 도착했다. 

마르코를 만난 모양인데 사진 찍을 새도 없이 훌쩍 가버렸다고 한다. 마르코와 같이 걷던 로는 어디로 갔는지 묻지 못했다. 

같이 와서 끝까지 같이 가는 이들도 있고, 혼자 와서 같이 가는 이들도 있고, 같이 와서 혼자 가는 이도 있다. 


그날 있었던 일 몇 가지 기록하고 나서, 다시 '돌아가서 할일' 정리 모드다.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아서인 것 같다. 

여행 사진 정리해서 메일 보내기, 골라 놓은 책 읽기, 영어학원 등록하기, 회사에 가서 작별인사하기, 주역 공부하기, 생계 준비하기, 개인 명함 만들기, 회사 책상 정리하기. 

지금 보니 참 뿌듯하다. 책 읽기, 개인 명함 만들기 빼고는 거의 다 이루었도다.


당시 회사 사람들이 4월 14일에 밀라노로 출장을 간 모양이고.. 

1927년생으로, 순례길에서 2005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수첩에 적혀 있다. 


루이테랑의 알베르게는 전반적으로 유쾌했던 기억이다. 처음 만난 이들이 많았는데 계속 웃느라 배가 아팠다. 

이런 식이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항상 다음날 체크아웃 마감 시간을 묻는다. 아침에 짐 싸고 밥 먹는 시간을 알맞게 배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으면서 언제 나가면 되냐고 물었더니 주인장 둘 중 하나가 대답했다. as soon as possible.

내가 막 웃으니까 다른 주인이 9시라고 알려 주었다. 

처음에 대답했던 주인이 정색을 하고, "오늘 9시야. 나가." 뭐 이런. 


이날, Andre, 그리고 피네스테레까지 동행한 Jean Pierre를 새로 만난 건가? 

여튼, 일별로 날짜를 계산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이 날부터였던 것 같다. 

남은 날들을 쭉 적고, 그 밑에 예상되는 목적지를 적어 놓는 식이다. 매일 아무리 정교하게 계산해도 매일 예상을 빗나가는, 하나마나한 취미 생활, '계획 짜기'. 



하도 오랜만이라 표지판 한번 올려 봤다. 어인 일인지 순서가 자기들 마음대로 뒤죽박죽이 됐다. 하늘의 뜻인 걸로. 


이날의 하늘도 하루에 만번쯤 변했다. 것도 뭐, 한 6년 있으니 다시 변화에 무감해지기는 하더라만. 


디니, 그리고 엘렌. 잘 가던 티로를 엘렌이 붙잡지만 않았어도. 책임을 물을 수도, 그렇다고 고맙지도 않다. 


여기가 어딘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딱히 슬프지는 않다. 좋은 기억이 사라진 것처럼 나쁜 기억들도 사라졌을 것이므로. 


예쁜 동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겠다. 




슬슬 지겨워지는 호리병.


사진이 뒤죽박죽이 되다니. 무슨 조화일까. 


방명록에 저 따위로 글을 써 놓다니. 좀더 결정적이고 감동적으로 쓸 수 없었냐 말이다. 


4.3 항쟁이 일어난 날이로군요. 

날이 갈수록 산티아고로 가는 발걸음을 늦추고 싶습니다. 

꼭 죽을 날 받아 놓은 것 같아요. --;

그렇지만 뭐, 길은 길일 뿐이니까요. 

그간 널어 놓은 것들 하나씩 주워 담고, 버릴 건 버리면서 끝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27일간 무사고로 여기까지 온 것, 걱정해주고 염려해주는 많은 분들 덕인 것 압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many thanks for praying for me. 



이 때만 해도 다치지 않고 걸을 수만 있어도 뜨겁게 감사하고 행복해 했구나. 이 때만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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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한동안 또 덮어 놓다가, 두고 볼 것도 없이 앞으로도 이런 식이겠지. 


한때, 강한 동기와 목표의식을 가지고  아무리 노력해도 일이 안 되길래 

목표를 잊고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자세로 살면 안 되던 일이 될 줄 알았다. 순진하게도. 

그래서 한동안 실제로 아무 생각 없이 살기도 했는데, 그런다고 또 뭐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초심자의 운 때문이었는지, 삶의 자세를 180도 바꾸고 나서 아주 잠깐, 들인 노력에 비해 보상을 많이 받기도 했는데, 오래 가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목표를 잊은 게 아니라 잊은 척 한 거였다. 

!!!


계획을 치밀하게 세운다고 해서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내 그럴 줄 알았지' 하며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고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뜻'이라는 것이 있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하더라도 나의 원래 뜻과는 다른 결과가 나온다. 

그러니 더욱 결과에 초연하기로. 

(음. 나의 순례기는 내가 세상에서 없어져지만 끝이 나겠군.)


여튼. 

그새 많은 일이 있었다. 5년 전의 순례도 진작 끝났고, 티로의 생일도 지나갔다. 

티로를 만날 때마다 하던, 생리도 끝나가고 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거지? 오늘은 노동절이고 나는 사무실에 앉아 있다. 


폰 페라다에서 비야프랑카델비에르조로 떠난 날은 2010년 4월 2일, 금요일이다. 

휴일 같지만, 마침 오늘도 금요일이다.  

티로를 못 만난 지 5일째로 접어들었고, 샤나, 엘렌, 디니는 거의 매일 하루에 한 번 이상 만난 것 같다. 


이 날은 웬일로 몹시 착했던 하루였다. 

수첩 한 가득 잘못했던 일들을 적고는 '반성한다'고 써놓았다. 

제일 먼저, 엄마한테 못되게 군 것을 엄청 반성한다고 써 있는데, 음, 지금도 그러고 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것은, 반성 철회. 그 때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에너지와 시간과 돈을 과소비한 것은, 음, 한동안 반성 모드로 살았는데 최근 들어 소비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안 그럴 수 있었으면 안 그랬겠지. 내가 악당도 아니고. 

내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는, 지금 시점에서 보면 내 몸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으로 바꾸어서 반성하고 싶다. 


며칠 동안 티로를 못 봤는데, 보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버벅거리다가 중요한 말들을 까먹게 될까봐 

수첩의 다음 장에는 티로를 만나게 되었을 때 해야 할 말들을 적어 놓았다. 

가우디 이야기, 사업 이야기, 치유하는 방법, 취향, 선입견, 명상, 복권, 그리고 사과하기. 

지금 보니 그렇게 중요한 주제들도 아니구만. 

늘, 매일, 티로와 다시 만나게 되면 나눌 이야기들을 적던 시간들. 

가장 눈에 띄는 말은, "할 말을 이미 다 나누어서 더이상 할 말이 남아 있지 않다"라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세상에 나가서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겠다"에 대한 나의 의견. 

얼마나 많은 사람을 치료할 것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 명을 제대로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 한 명은 바로 자기 자신. 


엄마 아빠 문제가 이 날 좀 풀린 것 같기도 한데, 시간이 지나 별 무소용이 되었다. 

둘다에게 착하고 싶었고 평화를 좋아했던 나는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싫었다. 

싫었던 것의 근원에 있던,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서 묵은 내가 나는 사랑이 있었다. 

수첩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무엇이든. 내 의지, 내 선택, 내 행동의 결과다. 피해자인 것처럼 굴지 말자." 

어떤 것이든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는 그 때의 생각에는 지금도 동의한다. 

떼를 쓸 일이 아니다. 



아래 사진은, 아무리 작은 마을을 가도 꼭 있는 부활절 퍼레이드, 세마나 산타. 






어느날 티로와 걸을 때 무지개를 본 다음부터, 무지개가 특별해졌다. 


빈 교회에 들어가 봤더니 세마나 산타에 쓰이는 각종 소품과 가마와... 솔직히 좀 그로테스크했다. 



흔한 풍경들. 다른 계절은 어떤지 궁금하기는 하다. 





웬만큼 더러움에 익숙한 내가 기겁을 한 컴퓨터와 키보드. 해도해도 너무했어. 

지금도 그 감촉이 생각난다. 키보드를 두드릴 때마다 손가락 끝에 쩍쩍 달라 붙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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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시여. 이 빌어먹을 우연에 제가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게 하소서. 

2010년, 시간이 멈춘 이래 앞으로 나가지도, 지난 일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로 옴짝달싹 못하고 갇혀 있다가 

재작년인가, 하는 데까지 해보자 하고 하루하루 정리하다가 세상의 시간에 금세 추월당하고는 다시 넋을 놓아버렸었다. 

다시 기억해 내지 않으면 안되는 일들, 점점 희미해져 가는 사람들, 생각들, 느낌들이 

몇 년째 안에서 차오르다 차오르다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도저히 꺼낼 수가 없어서 모른 체 했더랬다. 


코엘료의 책들을 읽던 도중, 정작 초기에 그를 유명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순례자를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마도 3월 초였었다. 

하루면 도착한다고 안내돼 있었는데, 다른 책들 때문인지 이틀이 가고 사흘이 가도 오지 않았다. 

마침내 책을 받아든 날은 공교롭게도 3월 6일. 5년 전의 거사(!)가 있었던 바로 그 전날이었다. 

이건 무슨 조화인가, 하고 잠깐 생각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그냥 털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그냥 지나가지만, 내 언젠가 소설 속의 지명과 의례들을 나의 기록 위에 얹어 볼 테다.) 


어제(3/30), 손님을 집에 들여야 해서 여기저기를 정신 없이 치우던 중 

책장에 놓여져 있던 까미노 기록 3종 세트(수첩, 알베르게 안내 종이, 안내 책자)를 발견하고 무심히 가방에 넣고 집을 나와서

사무실 책장에 아무렇게나 넣었었다. 


긴박한 사건사고가 터지는 와중에 오늘 하루에만 철지난 이야기들에 대한 포스팅들을 숙제하듯이 쏟아내고,

막 책상을 정리하려다가 여행 기록들을 적은 포스팅을 보게 됐다. 

책장 안에 넣어 둔 수첩을 꺼내 든 것은 정황상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년 전의 기록은, 매일 조금씩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다가 하필 3월 31일을 마지막으로 끝나 있었다. 

이 정도 우연에 흔들리기에는 그간 겪은 경험이 아깝다. 

그렇지만 등골이 오소소 떨리는 것은 사실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이 이렇게 되려고 이러는 건지, 집 컴퓨터를 백업한 외장하드를 사무실 책상 서랍 안에 넣어 둔 것이

생각났다. 


이상한 우연에 각종 보조기억 장치와 관련 이미지까지 구비되어 있으니 더이상 물러설 수 없을 것 같다. 

매년 사순과 부활을 지내면서 겪었던 마음 고생에 비하면, 묵은 기억을 불러내는 일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5년 전 오늘, 나는 라바날 델 까미노에서 있었다. 라바날에 도착했던 그 날 비가 왔던 것처럼, 오늘도 비가 오고 있다. 

이미 지난 일에 주책 없이 가슴이 다시 아플까봐, 차마 다른 포스팅들을 들춰보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써내려갈 것은 2010년 4월 1일, 라바날에서 폰페라다까지의 33km, 9시간 반을 걸어간 기록이다. 

전날 눈이 와서 길에 눈이 많이 쌓여 있다. 이 날은 크루즈 데 페로에 간 날이다. 

다들 십자가 아래에 무언가를 묻는다고 들었는데, 소중한 걸 묻는 건지 버리고 싶은 걸 묻는 건지 그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혼자 오랫동안 걷게 돼서 아무도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수정, 엘렌, 디니, 마르코, 로를 만났다. 

지금껏 만났던 50-60명 중 5-6명하고만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는 것을 보면, 만나게 돼 있는 사람만 만나게 돼 있는 것 같다. 


이날은, 까미노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등장한다. 

가족처럼 매일 만나는 것이 당연해 진 사람들을 언젠가부터는 다시는 못 보게 될 텐데, 그 어색함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장 지금, 5년이 지나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4월에 오는 눈 따위, 하나도 안 신기하다. 하루에 봄여름가을겨울을 다 겪게 하는 희한한 날씨다. 


루즈 데 페로에 도착할 때까지, 뭘 묻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을 하고 나니, 마치 연극 대본을 받아든 배우처럼 망설임 없이 무언가를 묻었다. 

여전히, 가장 소중한 것을 묻는 건지 가장 버리고 싶은 것을 묻는 건지가 불확실한 가운데, 나는 나를 묻었다. 

명함 하나를 꺼내고, 노란 재생지로 싸서는 돌 아래에 두었다. 

처음에는 명함이 고작 직딩 19년밖에 의미하지 않으니 명함에 내 삶 전체를 담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었지만, 

그 날까지 살아온 삶의 결과이자 총화라는 생각이 나서 가차 없이 묻었다. 


다시 시작하자. 


라고 쓰여 있다. 수첩에. 

나는 그 때까지 그 모습으로 살아온 내가 정말 싫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흥, 이제 너 정도 크기는 안 무서울 때가 됐다고!' 하면서도 행여 눈이 마주칠까 슬금슬금 피하게 되는. 


고이 잠드소서. 오늘도 그 앞을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도 평화. 


산 하나만 넘으면 동네 그늘진 곳에도 눈 한 톨 없는 이런 날씨, 이제 하나도 안 신기하다. 




마을 이름과 알베르게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는, 양면 인쇄된 A4 용지는 이제 1/4밖에 남았다. 

5년간 내 발목을 붙잡고 있던 이 길도 이제 곧 끝이다. 정말로, 끝. 끝. 끝. 


폰페라다 도착. 짐을 풀자마자 동네 성으로 올랐다. 33km 걷고 나서 동네를 돌아다니다니. 지금 생각하니 제 정신이 아니었다. 


젠장할, 망할 쌍무지개 같으니라고. 

티로와 걷던 시골길에서 보았던 선명한 쌍무지개가 생각나 버렸다. 5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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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1일 수요일, 아스토르가(astorga)에서 라바날 델 까미노(rabanal del camino)까지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22.7km를 걷고 하루를 마감했다. 아스토르가의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몇몇 순례자들이 사람들 소식을 전해 왔다. 우리가 레온을 지날 때쯤 순례자들 사이에 설사병이 돌았다고 했다. 마실 수 있다고 써 있는 길가 샘물을 마신 사람들이 줄줄이 탈이 났다는 소식이었다. 문제가 생긴 사람들 이름 중에는 진과 마르코도 있었다. 티로 소식은 수정에게 들을 수 있었다. 어디선가 동행을 했는데 아시아 여자를 보면 말을 걸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아마도 그는 "네 짝은 동양 여자다"는 계시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한참 지나서 들은 거지만, "미친 동양 여자를 거두는 게 자기 운명"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기는 하다.

 

이 날 일은 별로 기억나는 게 없다. 그때는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머리 속은 온통 티로 생각 뿐이었다. 사진을 봐도 6시간 동안 구름 한점 없이 맑았다가 흐렸다가 다시 맑았다가 하면서 하늘이 버라이어티 쇼를 했던 것만 있다. 수첩을 보니 흠. 좀 흥미로운 게 있군.

이 날은 24일차였는데, 수첩에는 "길 위에서 마치 23년을 산 것 같다."고 써 있다. 하루가 1년처럼 길었다는 뜻도 되지만, 1년에 한번, 아니 평생에 한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일들이 단 하루 만에, 것도 거의 매일, 일어나는 곳이었다, 그 곳은. 사방이 뻥 뚫린 곳에서 하루를 보내다 보면 별별 해괴한 경험을 하거나 보게 된다. 그리고는 알게 된다. 단 하루, 24시간 동안 모든 것이 일어나고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다는 것을.

까미노가 끝나고 나면 예전의 자기와는 전혀 다른 자기를 만나게 될 거라는 말을 누군가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저 계산법에 따르면, 30세에 시작해서 35일을 걷고 나면 길 끝에 65세의 노인이 서 있는 식이니, 그럴 법도 하다.

 

수첩에는 또

*생계 유지

*가치 있는 일

이라고 써 있다. 나름 2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한 터라, 먹고 사는 문제가 엄청 걱정이 되긴 됐었나 보다. 아빠는, 마흔 두 살이 되던 해에,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바로 그 해에 꽤 오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은연 중에도 나는 아빠보다는 오래 회사를 다녀야 할 것 같았었다. 2010년에 나는 마흔 셋이었다.

 

라바날의 알베르게에서는 아마도 페드로와 플로리안을 만난 것 같다. 그들의 이름 밑에 "얼마나 더 걸어야 보고 싶은 사람을 우연히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라고 써 있다. 나는 나만 보는 내 수첩에다가도 "티로가 보고 싶다"라고 쓰지 않았다. 그냥, 소식을 들을 수 없어서 걱정 된다고, 어디 있는지 궁금하다고 쓴 게 다다.

 

조금씩 기억이 나기 시작한다. 저녁에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들으러 성당에 갔었는데, 아마도 그 날은 성가를 부르지 않는 날인 것 같았다. 미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는데 노래 비슷한 건 한 마디도 못 들었다. 아마도 엉뚱한 성당을 갔거나, 아마도 날이 정해져 있거나 했겠지. 성당 밖으로 나갔을 때는 그냥 맞기에는 좀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순례자들은 성당 처마 밑에 오종종 모여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티로와 헤어진 지 나흘째가 되자 별별 생각-이 자식이 나를 일부러 피하는 게 틀림 없다, 설사병이 났나 따위-이 다 들었던 나는  마음이 울적해져서 쏟아지는 비를 그냥 맞으면서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날은 아마도 크루즈 데 페로에 가는 날인 것 같다. 수첩에 무엇을 묻어야 할까 하고 묻고 있다.

 

아래 사진들은 6시간 동안 펼쳐진 라이브 구름 쇼와 기타. 길바닥이 뭘로 만들어졌는지, 비가 와도 질척거리지 않고 해가 나면 또 금방 말랐던 것 같다.

 

 

전날은 그냥 구경만 하고 지나갔었는데, 이 날은 화살표 아랫부분을 조금 손질(아니 발질)해 주고 갔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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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30일 화요일, 걸은 지 23일째 되던 날에는 아침 8시 30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7시간 동안 16km 간 다음에 더이상 가지 않고 멈추었다. 분명히 뒤에서 걷고 있는 건 확실한데,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아무리 못해도 지난 사흘간 최소한 한두 번은 마주쳐야 하는데 마주치기는 커녕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던 티로와의 거리가 더 벌어질까봐 빨리 걸을 수 없었다, 고 생각한다. (그때는 그걸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는 말이다.) 바에서, 혹은 알베르게에서는 아는 사람을 만나건 모르는 사람을 만나건, 아~주 오랜 시간을 전반적이고 무난한 순례 이야기로 보낸 다음, 내가 아는 누구를 혹시 그도 아는지, 우리가 서로 아는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소식을 물었고, 티로는 차례차례 이름 불리워진 순례자들의 맨 마지막에서 두어번 째쯤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튼. 30일 아침에 바이커들이 자전거를 점검하는 동안 나는 먼저 숙소를 떠났다. 1시간이 좀 안됐을 때, 뒤에서 바이커 하나가 나를 불러세웠다. 전날 호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의 바에서 라바날의 그레고리안 성가를 적극 추천했던 호세루(Joseluis)였다. 자전거를 급히 세운 호세루는 내게 다짐하듯 물었다. "어제 내가 말한 거기가 어디라고?" 내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호세루가 말을 이었다. "라바날이야. 아스토르가가 아니고." 

아니, 그 말을 하려고 그 아침에 혼자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 거야?

바람처럼 사라져가는 호세루의 뒷모습을 보며, 한참을 울었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문을 열라고 열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조금 연 문틈으로 사정 없이 몰아쳐 대던 인간은 나몰라라 하고 떠나 버렸고, 정작 조건 없이 호의를 베푸는 낯선 이들에게서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 그 상황이 대책 없이 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마워, 호세루. 고마워, 필리. 고마워, 카누토. 고마워, 이케. 고마워, 밀리.

 

사진을 보니 이날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난다. 이상한 상징물들을 지나서 언덕을 올라갔는데 창고처럼 생긴 집이 뜬금 없는 곳에 있었다.

바인가 하고 들어가 봤더니 아무도 없었다. 창고 같이 생긴 안은 넓고 어둡고 추웠는데, 구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웬 거지 차림을 한 남자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나 나왔다. 여기는 뭐하는 데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그냥 거기 살고 있고, 필요한 건 밖에 있으니까 알아서 먹고 알아서 돈 내고 가란다. 초록색의 간이 포장마차 안에 커피며 쿠키며 등등이 놓여 있었다. 먹고 싶은 것도 마시고 싶은 것도 없어서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화장실을 가야하나 하고 잠깐 생각했는데, 아무 것도 안 보태고 화장실을 쓰는 게 좀 미안해서 그냥 나왔다.

그리고 결국, 저 집을 나와서 30분쯤 걷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노상방뇨'라는 것을 했다. 그간 티로와 함께 있으면서 몸에 밴 'why not.' 정신으로. 기분이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까미노 노상방뇨 이야기는 여기저기에 가끔 나온다. 방광은 터질 것 같고, 화장실은 없고, 어쩌라고.

 

걷다 보니 갈림길이 나왔다. 허허벌판이었는데 화살표가 없었다. 앞뒤로 사람은 없고, 어찌할 바를 몰라서 멈춰 섰는데, 길 위에 순례자들이 자갈로 만들어 놓은 화살표가 보였다.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 놓았을. 바람에 자갈들이 잠시 흐트러졌더라도, 뒤에서 걷던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뒤에 올 다음 사람을 위해 다시 가지런하게 정돈해 두었을. 눈물이 솟구쳤다. 이렇게 뒷사람을 생각하는 마음들이 모이고 모인 곳이니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은 거겠지.  

 

멀리 마을이 보였다. 20일 쯤 걸으면 눈으로 거리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앞에 보이는 집들은 약 2km 떨어져 있으니 기어 가도 1시간이면 통과하게 될 것이고 멀리 보이는 집들은 4~5km 떨어져 있으니 천천히 걸어도 1시간 반이면 족할 것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가니 '오아시스'라는 이름의 바가 있었다. 티로와 함께였다면 '오아시스인데 당연히 목을 축이고 가야지'하며 들어갔을 것 같아서,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세 시간을 기다렸는데 티로는 커녕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래 사진은 길 한 가운데서 딱 마주친 강아지. 서로 한동안 기싸움을 하다가 내가 먼저 봐 줬다.

 

아스토르가(astorga)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더 걸어갈 수 있었는데, 그냥 멈추기로 했다. 가우디가 지었다는 건축물도 보고 싶었고, 티로 소식을 듣고 싶기도 했다. 아래 건물은 아마 시청 쯤 됐던 것 같다.

 

저기 아래에 단단하게 지어진 건물이 가우디의 작품이다. 바르셀로나에서 봤던 것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뭐지? 좋은 건지 그냥 그런 건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티로였다면 뭐라고 했을까. 티로였다면, 티로가 있었다면. 젠장할.

 

 

숙소에 체크인을 하는데, 순례자나 마을 사람들이나 모두 조금씩 들떠 있는 것 같았다. 몇 시에 무언가를 한다는데, 모르는 단어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몇 시가 되기 전에 카메라를 들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앞에, 내가 좋아하는 체구의 남자가 특이한 복장을 하고 걸어가고 있었다. 해질 무렵이었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조금 기다렸더니, 그 무슨 행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제사 그들이 흥분해서 말한 단어가 '프로세시옹'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을 사람 대부분으로 추정되는, 엄청 많은 사람들이 정해진 복장을 하고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레온에서 보던 것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뒤늦게 알게된 거지만, 스페인의 웬만한 마을들에서는 부활절을 앞둔 몇일간을 '세마나 산타'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계속 저런 행진을 한다고 한다. 나야 처음 보는 광경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매일 해야 하는 사람들은 매일 똑같이 의례와 행진에 전념할 수 있을까 싶은데, 그들은 매일 진지했고 매일 최선을 다했다.

 

아래는 수첩에 적혀 있던 내용들.

 

1층 침대만 있는 숙소, 오랜만이다. 너무 좋다. 나가서 필요한 것들 좀 사고 박물관에 가야지. 그 전에 맥주 한잔.

세상 일 참 뜻대로 안 된다. 병 고치러 왔다가 병 나서 가겠다. 최진영은 또 왜 그랬을까.(이 날 그의 자살 소식을 전해 들었다.) 호세, 마르코를 알베르게에서 만났다. 샤나, 엘렌, 로 등은 중간 갈림길에서 좀더 돌아오는 코스를 택했다고 한다. 나는 걷는 것을 싫어하니까.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알베르게에 묵었다가 피네스테레에 갔다가 다시 산티아고로 가서 파라도르에서 묵어야지.

메신저들에게. 나는 잘 있다고 전해 주시길.

한국에서 온 여자를 만났다.

버프를 샀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하는 수 없다.

티로를 만나면 나눌 이야기들 : 어린이(티로는, 뭘 할 건지 정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유난히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곰곰 생각한 끝에 나는 아이들과 같이 노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화살표 사인이 주는 의미, DBEW, 동북아시아, 개, 박물관, 교회, 십자가, 그리스도, 샐러드, 참치, 요플레, 바나나, 별자리, 음양, 먹는 순서, 정기신, 명상 등.

(반은 알겠고, 반은 모르겠다.)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깜짝 놀랐다. all by myself를 부르고 있었다. 나오는 노래 하고는. 라바날 지나서는 뒷일 생각하지 말고 가능한 한 많이 걸어야겠다. 9시부터 6시까지 9시간 동안 3km를 걸으면 하루에 27km를 걸을 수 있고, 그러면..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시간이.. 3월 30일에서 17일을 더하면.. 4월 중순.. 

 

길에서 만난 그들의 직업은..

재무 컨설턴트, 방송인도 있었지만 소방수, 경찰, 정원사, 간호사, 학생, 그리고 대부분은 실업자, 빈민. 한 순례자가 자기 직업을 자랑스럽게 'gardener'라고 말할 때 깜짝 놀랐다.

 

수퍼에서 참치 사고, 요플레 사고, 와인을 사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Jin과 Thilo 덕에 수퍼에서 무언가를 살 수 있게 됐는데. 둘다 대체 어딨는 거니? 산티아고로 계속 걷지 말고 여기서 딱 멈춰 버린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계속 걸을 수 있었지, 물론. 그렇지만 계속 걷는 것보다 그쯤에서 그만 두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아서 그냥 멈췄을 뿐이야." 하고 친구들한테 말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니,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남들 다 가니까 나도 갔어야 하나? 다시 까미노와 인생을 비교하게 된다.

셀레스티노와 호세를 만났다. 호세는 길에서 만난 한국인 여자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징표를 보여 주면서 "이랬었는데, 이게 사랑이 아니라고?"하며 내게 거듭거듭 물었다. 나는 그만, 같이 얼싸안고 울고 싶어졌다.

빠리로 가는 저가 항공을 누군가가 알려 주었다. Girona? 라고 써 있는 공항에서 빠리까지는 100유로면 된단다.

 

(그리고, 수첩에는 그간 만났던 순례자들의 이름이 죽 써 있다.)

Annie, Chris, Christian, Suzan, 오츠카, Alex, Aulelio, Florian, Omori, Alan, Diny, Ellen, Yoerg, Kike, Ro, Marco, Laszno, Genaro, Carlos, Claudia, Thilo, Diana, Holgut, Rene, Nora, Laura, Pedro, Shanan, Jin, Adrian, Inge, Maro, Francois, Rudi, Biati, Rudi, Fangyang, Jennifer, Pili, Canuto, Mili, Joselu, Iker, Cyndi, Jose.

(반은 알겠고, 반은 모르겠다.)

 

알베르게의 1층 거실에서 그날 새로 만난 순례자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신 나는, 그들과 몹시 친해져서는 꼭 서로 사진을 교환하기로 하고, 메일 주소와 전화번호를 주고 받은 다음 잠이 들었다. 아마도 이 알베르게에서 다시 알렉스를 만났던 것 같다. 얼굴 못 본지 열흘도 넘었지? 건강하게 계속 걷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길 위에만 있으면,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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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며칠 열심히 따라잡으려 했지만 역시. 기운 딸리는 일이었다. 3월 29일 레온에서부터 매일매일 조금씩 전진해서 산티아고까지, 그리고 산티아고에서 피네스테레로, 피네스테레에서 다시 산티아고로 걸어 가는 어느 지점, 4월 중순의 어느 날까지의 일기는 거의 매일 똑같다.

 

오늘은 2013년 4월 11일. 전날 한차례 푸닥거리를 끝내고 낮잠을 7시간 반을 잔 덕분에 밤을 꼴딱 샜다. 2010년 4월 10일에 어디 있었나 수첩을 찾아보니. 그날은 마침 산티아고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벌써 그렇게 됐구나. 프랑스와 체코를 오가며 사는 여행자와 5일을 시시덕거리며 지내는 동안. 추스리고 일상에 몰두하는 동안. 모처럼 사방에 신경질을 뿌려 대는 동안. 어제는 광분해서 퍼붓느라고 오후에는 거의 기절 상태에서 잠에 들었다.

 

앞으로 당분간은 말을 더 보태지 않겠다. 수첩에 있는 키워드들만 문장으로 만들어 옮겨 놓기로.

 

2010년 3월 29일 월요일-아는 순례자가 아무도 없는 작은 마을인 호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에서 자전거쟁이 남자 다섯과 한 방에 잠.

죽자고 걸어서 33km나 왔다. 대인기피증인 것 같다. 아는 순례자들을 만날까봐 땅만 보고 걸었다.

밥 먹을 때 테이블에 왼팔 얹지 말기. 돈데 에스따 엘 까미노? 하루종일 죽어라 연습해도 안되는 스페인 r 발음. 연습이 부족해서 안되는 거라며. 해도 안된다 이 자식아.

(종일을 그렇게 티로가 남긴 흔적과 함께 걸었다.)

내일도 멀리멀리 가야지. 까미노가 덜컥 끝나면 하루 종일 뭐하고 사나. 화살표도 없는 곳에서.

*not being organized. 앞으로 견지할 자세.

*purpose of life. 나는 뭐를 하겠다고 세상에 나온 걸까.  

음식을 남기게 될 때마다 티로가 생각난다. 곧바로 돌아온 습관. 새로운 음식을 시도하지 않고 스파게티를 시킨 게 잘못이다. 빌어먹을 썸머 타임.(레온에 들어간 날, 그 유명하다는 레온 성당에서 그 유명하다는 미사를 구경하려고 했었는데 하필 3월 28일부터 썸머 타임이 시작돼서 놓쳤다.)

이렇게 꾸역꾸역 먹어대니 하루에 30키로를 걷는들 살이 빠지겠나. 와인도 혼자 마시니 맛대가리가 하나도 없다.

길에서 신디를 만났다. 생각이 깊고 밝은 여자였다. 오늘 출발했다고 했으니 잘하면 20키로쯤 걸었겠다.

다섯 바이커와 바에서 술을 마셨다.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주고받았다. 한 바이커가 라바날 델 어쩌고 하는 데 가면 그레고리안 성가가 유명하다고 수첩에 메모해 주었다. 디저트로는 나틸라스?(natillas)를 꼭 먹어 보라고 한다. 바닐라 크림이란다.

 

사진을 올리려고 보니 또 말을 보태고 싶다. 참자. 잊어먹지 않기 위해 캡션만. 곧 나가야 할 시간이다.

 

전날 묵은 레온의 알베르게 입구. 새벽에 나서면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유서가 깊다지.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레온 성당. 전날 저길 갔었어야 해.

 

앞에 디니와 엘렌이 걸어간다. 마주치기 싫어서 걷는 속도를 급히 늦추었다.

 

레온의 파라도르. 수도원이었나 병원이었나 궁전이었나. 셋 중 하나였는데.

 

 

저 멀리 길건너 표지판에는 산티아고까지 도로로 324km 남았다고 써 있다. 어느새.

 

누히 말하지만 극단적으로 맑다가 극단적으로 흐려지면서 하늘이 점점 세를 넓혀가는 흐린 부분과 여전히 맑은 부분으로 딱 쪼개지던 그날은 이 사진에서 먹구름 색이 제일 짙은 부분보다 더 시커맸더랬다. 너무 경황이 없어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것이 천추의 한이다.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었던 곳부터 순식간에 몰려오기 시작했던 먹구름은,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내는 데 걸렸을 시간보다 훨씬 짧았을 것 같다.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사람은 아마도 믿지 못할 것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 다리 아래 흐르는 강 이름이 오르비고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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