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13년 3월 30일)도 낮잠을 두 번 자는 바람에 시간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렇지만 괜찮다. 졸리면 자면 되고 눈 떠지면 일어나 움직이면 된다. 어차피 내일은 할일이 많아서 딴 짓을 할래야 할 수도 없다.

 

오랜만에 손님이 오니까 청소도 해야 하고 화요일 스터디에서 나눠 줄 번역도 해야 하고, 스터디 준비도 해야 한다. 음.. 무엇보다 소금을 사야 한다. (3년 전에 네팔에서 거머리 방지용으로 샀던 소금을 겨우 다 먹었다. 다른 곳에 소금이 떨어져 간다는 말을 쓰면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라고 했더니 혹자는 소금에 대해 쓴 걸로 이해하던데, 나는 거머리를 말하는 거였다. 거머리도 태어났으면 살아야지. 사람이랑 거머리 중에 누가 더 피 많이 빨아먹나 어디 한번 계산해 볼까.)

 

3월 28일 일요일, 레리에고스(reliegos)에서는 티로와 같이 다니던 날들과 다르게 8시에 숙소를 나왔다. 이 날부터는 혼자 걸어야 했다. 6km쯤 걸어서 다음 마을에 있는 까페에 들어갔다. 순례자들이 하나둘 까페로 들어와서 자리잡기 시작했다. 혼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아무도 내 옆에 오지 않았다. 당연히 티로가 와서 합류할 거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티로는 늘 숙소에서 맨 마지막으로 체크아웃 하기 때문에 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30분쯤 지나서 까페로 들어왔다. 주문을 하고 눈인사를 건네더니 다른 순례자들 옆에 가서 앉았다. 아, 정말 잔인했다.

 

남아 있던 빵을 급히 먹었다. 그래도 말 없이 나가면 다음에 만날 때 너무 어색할 것 같아서 식사를 끝내고 티로한테 가서 작별 인사를 했다. "몸 조심하고, 보게 되면 보자." 티로도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 리스트를 보면서 굵은 글씨로 쓰여 있는 레온(leon)까지 가기로 계획했다. 레리에고스에서 레온까지의 거리는 26km였다. 제대로 만난 적도 없으니 이별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고, 곧 또 다시 보게 될 거라서 티로와의 일을 더이상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걷는 일에 집중했다. 이 날은 순례자들의 무덤을 여러 개 보았다.

 

무덤도 필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잠든 듯이 누웠다가 새들과 짐승들의 먹이가 되고 흙이 되고 거름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꼭 누가 기억해줘야 맛인가. 그 기억이라는 것, 몇 년이나 간다고.

 

 

"만실라에서 레온까지, 쉽고 싼 택시를 타세요." 라고 써 있는 광고판. 쉽고 싼 유혹에 빠지기에는 그간 걸은 20여 일이 너무 아깝지.

 

원래 속도보다 느리게 가지도 빨리 가지도 않았는데, 순례자들은 하루 종일 눈에 띄지 않았다. 그냥 풀, 바람, 강, 나무, 하늘, 먼저 간 죽은 이를 벗삼아 걸었다.

 

생각해 보면, 내 속도는 누군가 옆에서 동행하기에는 지나치게 불규칙적인 것이 사실이다. 티로 말대로 에너지가 일정하지가 않아서 그런 건지, 빨리 갈 때와 늦게 갈 때의 편차가 너무 심하다. 어떨 때는 빨리 오래 걸으면서도 지치지 않고, 어떨 때는 천천히 조금만 걸어도 지쳐 버리기 때문에 아무도, 나조차도 그 날의 내 패턴을 예측할 수가 없다.

 

티로는 내 걷는 속도를 가지고 에너지 불균형을 지적한 건 아니었다. 나는 말할 때 익숙한 부분은 지나치게 빨리 말해서 사람들이 따라가기 힘들게 하다가 모르는 단어를 말해야 할 때는 급브레이크를 밟듯이 갑자기 멈춘다고 했다. 빠른 화살처럼 공중으로 쏴 대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중간중간 말이 툭 끊어질 때마다 듣는 사람들도 숨을 멈추고 기다려야 해서 불편하다고 했다. 듣는 사람 입장을 좀 생각해서, 문장을 속으로 먼저 만든 다음에 천천히 말하라고 늘 핀잔을 들었다. 

 

"나는 너처럼 계획적인 인간이 아니라서. 너나 충분히 생각하고 말하세요." 그때나 지금이나 참 뒷일 생각 안한다.

 

 

 

 

 

 레온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였다. 걷기 시작한 지 8시간 만이었다. 레온도 부르고스처럼 큰 도시였다. 혹시나 지나가는 순례자를 만날 수 있을까 해서 레온 입구에 있는 중국집에 들어갔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산티아고까지는 310km. 20km씩 천천히 걷는다고 해도 15일이면 족한 거리다. 중국집에 앉아서 다시 남은 날들을 계산했다.

 

체력이 몰라 보게 좋아진 것을 느꼈다. 몸무게를 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졌다.

 

식당을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주머니에서 툭, 하고 럭키스트라이크가 떨어졌다. 티로와 같이 피던 담배였고, 전날 분명히 티로가 챙겼던 거였다. 아까 아침을 먹은 식당에서 잠깐 둘이 이야기를 나눌 때 티로가 슬쩍 주머니에 넣어 준 것이 분명했다.

 

"이런, fuck!" 입에서 나도 모르게 영어 쌍욕이 튀어 나왔다.

 

 까미노를 따라 숙소를 찾아 갔다.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오래된 숙소는 굉장히 넓었다. 산티아고에 가까이 갈수록 각지에서 모여드는 사람들로 알베르게는 붐볐다. 그 곳에서 샤나, 엘렌, 디니, 애니, 로, 마르코를 만났다. 그간 티로랑 다니면서 한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서로 안부를 주고 받았다. 서로 아는 순례자들의 이름을 대면서 잘 있나 확인하기도 했다. 나는 전날까지 티로와 같이 있었으며,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해 주었다. 혹시 누군가 업데이트를 해 주기를 바랬는데, 그 날 아무도 티로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밤이 되자 사람들이 숙소 밖으로 뛰쳐 나가기 시작했다. 천주교 전통을 알 리 없는 나는 영문을 몰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다가오는 부활절 관련 행사가 곧 있을 거라고 했다. 다른 순례자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더니 이상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길에 가득했고, 그 사람들을 구경 나온 인파들로 거리는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티로가 옆에 없는 것이 아쉬웠다. 잔소리도 그리워졌다.

 

내가 "까미노 아끼?" 하면서 현지인한테 물을 때마다 티로는 치를 떨며 제발 "돈데 에스따 엘 까미노?" 라고 문장 전체를 말하라고 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내가 그렇게 문장으로 말하면 상대편이 내가 스페인말을 잘 하는 줄 알고 훨씬 더 길게 말할 텐데 그럼 어떡하냐고 되물었다. 티로는 어이 없어 하며, 게을러서 노력하지 않는 거면서 다른 이유를 댄다고 나무랐다. 나는 지지 않고 다시 되받아쳤다. "뭐, 이유? 이유랍시고 맨날 변명만 늘어놓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보고 싶다.

 

우리 숙소 옆 건물에서 꺼먼 옷을 입은 사람들이 끝도 없이 나왔다. 솔직히 별 재미가 없어서 레온 시내에 있는 pc방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늦게 숙소에 들어가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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