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빌, 뭐가 이렇게 써도써도 끝이 없는 건가. 너무 지루하고 너무 힘들고 너무 마음이 아프다. 어쨌거나. 

 

3월 27일 토요일 아침, 한 침대에서 눈을 뜬 우리는 각자의 계획과 생각을 나누었다. 티로는, 진작부터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길에서 순진한 동양 여자 꼬셔서 볼일 다보고 버린 나쁜 남자라는 오해를 받기는 싫어서, 그리고 우리를 아는 순례자들이 나를 버림 받은 여자라고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도 싫어서 며칠을 더 함께 동행하면서 충격 없이 서서히 잘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물었다. 그게 오해가 아니라면 우리가 이해해야 할 너의 진심은 무엇이냐며. 그는 동양 여자가 아무래도 자기한테 맞는 것 같아서 동양 여자를 만나면 좀더 깊이 알고 싶어진다고 했다.

 

창밖은 이미 훤하게 밝았는데, 우리는 커튼을 꼭꼭 드리운 채로 '그럼 이번이 마지막' 이라며 다시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날 만난 그 어린 중국인 대학생한테도 그렇게 간 쓸개 다 빼줄 듯 친절하게 굴었냐며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시비를 걸었다. 그때까지 나를 껴안고 입을 맞추던 티로는 더 나빴다. 전날 만난 여학생 이름은 팡량이었는데,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로 하던 일을 계속 하면서 "팡량, 팡량, 오오, 내 팡량!" 하고 그 여학생의 이름을 불러 댔다. 살다살다 그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나는 카르마고 뭐고, 갑자기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씻고 배낭을 정리하면서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며칠 더 같이 안 걸어 줘도 될 것 같아. 그냥 오늘 헤어지자." 티로는 정말 그래도 괜찮겠냐며 물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그는 마지막 순간을 매번 너무 힘들어 한다고 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다른 일을 하면서 그 순간을 직면하는 것을 최대한 늦추다가 막판에 쫓기듯이 떠나거나 떠나보내는 방법을 주로 쓴다고 했다. 늑장을 부리다가 기차 시간에 쫓겨서 미친 듯이 달려가 버리거나, 뒤돌아보지 않기로 하고 서로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가거나 뭐 등등 무 자르듯이 단칼에.

 

썰렁하던 분위기는 어이 없는 작은 사건들 때문에 다시 확 피어올랐다.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차마 말을 못하겠고, 다른 하나는 침대가.. 침대 밑에서 침대를 지지해주던 막대기가 부러진 거였다. 정말 한참을 눈물을 흘리면서 웃은 끝에 나는 그냥 모른 체하고 나가자고 했고, 티로는 말을 하고 가는 게 예의라고 해서 다시 마지막으로 '진지한 토론' 모드로 돌입했다. 리셉션에는 어제의 남미 여자가 있었고 티로는 "아침에 보니 이게 떨어졌길래. 배상을 해야 할까요?" 하면서 최대한 건조하게 상황을 정리했고, 여자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냥 가라고 했다. 나는 좀 부끄러웠는데, 티로는 "걱정마. 남미에서 왔다잖아. 우리보다 더 과격하면 과격하지 덜하지는 않을 걸." 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숙소에서 나와서 마지막으로 아침을 함께 먹기 위해 까페로 갔다. 빵과 커피를 먹으면서 나눈 대화들은 무미건조하거나 서로를 자극하는 말들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종교 얘기가 나왔을 때 티로는 "한동안 가톨릭이었는데, 내가 교회를 떠났지." 하고 말했고 나는 빈정거리면서 "교회가 너를 떠난 거겠지." 하고 받았다.

 

이윽고 티로가 말했다. "내가 먼저 나갈까, 니가 먼저 나갈래?" 나는 남겨지는 것보다는 남기고 가는 게 마음이 덜 상할 것 같아서 내가 먼저 가겠다고 했다. 혼자 남겨진 사람 입장을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다. 티로는 한두 시간쯤 더 앉아 있다가 나가겠노라고 했다.

 

사하군의 까페를 나와서 걷기 시작한 건 아침 9시 30분이었다. 알렉스도 없고 티로도 없고 다른 아는 순례자도 없이, 나는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길 위에 서게 됐다. 조금만 살짝 건드리면 기다렸다는 듯이 눈물을 철철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사하군을 빠져나오려고 하는데 아침 장이 서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냥 지나갔을 테지만, 티로가 빙의를 한 모양인지 혼잣말로 "interesting." 하고 중얼거리며 장을 구경했다.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지가 않았다.

 

 

 

여느 때와 비슷한 날씨, 여느 때와 비슷한 풍경 속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순례자들을 만나게 되더라도 경계를 하게 되는 폼이, 처음 길 위에 섰을 때처럼 의심 많고 상처 많은 겁장이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 생각 안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 사하군을 벗어나 내달렸다.

 

산티아고까지 고작 315km 남았을 뿐인데. 헤어진 그날부터 매일 같이 있는다고 해도 15일이면 끝날 것을. 참 모질게 이성적인 인간이었다. 그렇지만, 매일 커버하는 거리가 비슷하고 취향도 비슷하니까 남은 날들 중 못해도 다섯 번은 더 볼 수 있을 걸로 생각했었기 때문에 솔직히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곧 또 볼 건데 뭐.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손바닥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라고 생각했다.

 

 

길에서 본, 또다른 순례자의 무덤. 나는 어느 길을 떠돌다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될까.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선배 순례자들처럼 숨이 끊어진 그 자리에 그대로 묻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들의 뜻이 아니라 순례자의 뜻을 따라 유해를 고국의 선산으로 모셔가지 않고 길 옆에 무덤을 만들기로 결정한 유족들도 존경스러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그 사람다울 수 있게 두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에 나오는 마을에서 오랜만에 엘렌, 디니 모녀와 또다른 남자 순례자를 만났다. 까페에서 음료수를 사서 함께 길가에 앉아서 마시게 되었는데, 그렇게 느껴서 그랬는지 분위기가 묘했다. 한동안 무리와 떨어져 있었던 탓에 그들은 그들대로 이미 그룹을 만들었고, 같이 나눌 이야기가 없었던 나는 어색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뭔가 달라져 있었다.

 

티로와 만난 이래 열흘 간, 혼타나스(hontanas)로 34km 걸은 것 외에는 줄곧 20km 남짓밖에 전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거리를 벌리려고 정말 미친 듯이 앞만 보고 걸었다. 내가 먼저 도착해서 짐을 푼 마을을 티로가 지나가게 될까봐 무서웠다. 알베르게 앞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있을 때 묵묵히 지나쳐 가는 티로를 보는 것을 상상하는 일은 괴로웠다. 

 

6시간 동안 31km를 걸어서 3시 반 쯤에 도착한 곳은 레리에고스(reliegos)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평소 시속 3km로 움직이던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내달린 셈이었다, 다음 마을은 6km나 더 걸어가야 했는데, 다음 마을에서 티로가 결혼 반지를 들고 기다린다고 해도 더이상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을에서 묵을 수밖에 없었다. 전날 만난 미국인 부자와 중국인 여학생(팡량)도 같은 숙소로 왔다. 그들은 독일 친구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대답했다. 대답하는 표정이 스스로 생각해도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그들이 의아해 하길래 한마디 덧붙였다. "우린 그냥 친구야."

 

설마설마 했는데, 한 시간이 가고 두 시간이 가도 티로는 오지 않았다. 전 마을에 멈춘 것일까. 내가 좀 멀리 오긴 멀리 왔지. 괜히 멀리 왔나. 아니야. 이게 맞아. 혼란스러웠다.

 

전 마을에 멈춰 선 것이 분명하다고 느꼈을 때쯤, 그러니까 올 거면 진작에 왔어야 했고, 그 시간까지 안 왔다는 건 길이 엇갈린 게 분명한 시간 쯤, 그러니까 6시 반쯤 1층 리셉션에서 시끄럽고도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늘 모르는 사람들과 장황하고 시끄럽게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는 티로의 목소리였다. 여느 때나 다름 없이 장황스러웠다. 속이 뒤집혔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한동안 밑에서 떠들던 티로는 숙소가 있는 2층으로 올라왔다. 나를 보더니 놀라는 눈치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는 표정이었다. 나중에 들었는데, 티로도 내가 평소처럼 20km 이상 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으로 무리해서 한 마을을 더 걸었다고 했다. 직전 마을은 13km 전에 있었다. 걷다가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남은 거리를 절룩거리면서 오느라 늦었다고 했다.

 

얼마나 마주치는 게 부담스러웠으면 그랬을까. 우리의 재회를 보던 미국인 일행은 '친구라더니 거봐. 역시 아니잖아?'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리는 함께 숙소 옆에 있는 바로 갔다. 티로도 함께 왔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건 정말 불편했다.  

 

바보야. 미련한 인간아. 앞으로 다시는 안 마주쳐도 괜찮으니까 다치지 마라. 나도 내 갈 길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너도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완주하도록 해라.  

 

2013년 3월 29일, 그러니까 어제 나는 좀 말이 통하는 편인 전직 거래처 인간을 만났다. 그의 주선으로 정신보건법 관련 레포트를 써야 하는 예비 변호사와 인터뷰를 하게 됐다. 전직 거래처 인간은, 예비 변호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게 설명을 너무 빨리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시야가 급격히 좁아지는 병에 걸려서 청력도 같이 나빠진 관계로 말을 너무 빨리 하면 못알아 듣는다는 거였다.

 

보기에는 멀쩡해 보여서 나는 자꾸만 말을 빨리 했다. 2차를 끝내고 헤어질 때에야 그가 조심스럽게 더듬으면서 한 발씩 떼는 것을 보았고,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도근시인 나와 달리, 그는 확보할 수 있는 시야가 3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책을 읽을 때 다다음 줄로 넘어가거나 읽었던 줄을 다시 읽는 게 다반사라고 한다.
나는 까미노를 끝내고 나중에 나중에 사라고사에서 만났던 한 브라질 의사가 생각났다. 그 여자도 비슷한 병이었던 것 같은데, 회전문도 잘 통과하지 못했다.

 

나는 갑자기 슬퍼졌다. 360도를 다 보기는 보지만 맨눈으로는 코앞에 있는 거울에 비친 지 얼굴도 안 보이는 병신과, 또렷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길고 가는 빨대를 통해서만 세상을 볼 수 있는 병신이 기구한 인연으로 만나게 된 셈이다. 여행을 한답시고 길로 나선 장님과 앉은뱅이 2인조를 보는 것처럼 처연했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그냥 드러내 보였을 뿐이었다. 그랬을 뿐인데 아픔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그 느낌은 뭐였을까.  

 

우리는 다들 아프다. 움푹 패이고 부러지고 곪아 터졌고 피 흘리지만, 기꺼이 서로의 눈이 되고 손이 되고 발이 되고 어깨가 되면서 함께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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