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또 시간이 이렇게 갔네. 도대체가 따라갈 수가 없구만. 작정하고 따라가는 건 아니지만. 아래는 열흘도 더 전에 저장하고 내팽개쳐 놓았던 글. 기억과 시간이 서로 섞여 정신분열증을 일으킬 듯. 안 일으킨다면 비정상일 듯.  

 

원래 이 글의 제목은 "칼보르-페레이로스와 포르토마린의 중간 마을(30)" 이었다. 

수첩에 '페레이로스와 포르토마린 중간, M something' 이라고 적혀 있었고, 생장피드포르에서 얻은 A4 한장 짜리 숙소 리스트에는 아예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록을 시작하면서 '이 마을 이름을 알려면 다시 가는 수밖에 없겠다'며 포기하고 있었는데 사진 속의 알베르게에서 마을 이름을 발견했다. 확인을 위해 검색을 해보니 그런 마을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기쁜 날이다. 뜬금 없지만 일단 기쁨의 글 한 편. 

 

낮과 밤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삶에서 꽃향기나 달콤한 허브향이 나고, 날마다 더 활기차고 더 반짝이며 더 영원하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이다. 모든 자연이 당신의 기쁨이니, 시시각각  신의 축복과 감사를 느낄 것이다. 생활 속에서 내가 거두어 들이는 진정한 수확은 아침저녁의 어슴푸레한 빛처럼 손에 잡히지도 않고 설명할 수도 없다. 내가 움켜쥔 것은 우주의 먼지요, 한 조각 무지개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루이스, 로자와 함께 했던 4월 5일 저녁은 정말 유쾌했다. 그들에게서 받은 긍정 에너지가 까미노 막판의 이상한 우울증을 한방에 날려주었다. 루이스가 부활절 행렬을 재현할 때는 웃다가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오만 가지 이야기 끝에 티로한테 줏어 들은 이야기들-명상이 정말 중요하다더라. 우주와 튜닝하는 거라더라 -을 하니 루이스는 진지하게 "스페인에도 명상을 하는 전통이 있어."라고 했다. 놀다놀다 지쳐서 잠드는 민족이 무슨 명상을? 처음 듣는 이야기라 귀를 쫑긋 세우며 스페인에서는 명상을 어떻게 하는데? 하고 물으니 그는 "흔히들 스페인 명상법을 '시에스타'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랬다. 그런 식이었다. 

 

하루에 백만 가지 이상의 우연이 만나서, 같은 알베르게에 들어서기 직전까지 어디서 어떻게 굴러먹고 살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5분도 안 지나서 전생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처럼 무턱대고 믿고, 의지하고,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한다. 그 날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웃고 울고 떠들고 먹고 마시다가 서로에게 남은 길을 기쁘게 축복한다. 까미노에서는 매일 매순간 일어나서 놀랍지 않은, 그냥 그저그런 수준의 당연한 기적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 밤이 기적)

 

110km 남았단다. 사나흘을 꼬박 걸어가야 되는구만 어찌된 일인지 산티아고가 바로 코앞에 있는 것 같다. 알았어. 알겠다고. 까미노 끝나가는 거 알겠으니까 그만 좀 말하라고. 남은 거리가 줄어들수록 심장이 타들어갔다. 

 

죄다 전날 사리야로 갔겠지. 최대한 걸음을 늦추어도 하루에 따박따박 20km씩은 걷게 되면서, 날로 시름이 깊어지고 있었다. 매번 일부러 까미노 바로 옆의 알베르게에 묵었고, 저녁 내내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는데. 티로를 못만난 채로 아침에 혼자 알베르게를 나설 때는 어제 하나를 덜 갔어야 했나, 아니면 하나를 더 갔어야 했나 하며 전날의 모든 선택과 결정을 애꿎게 원망했다. 

 

이 날은 종일 사진을 일고여덟 장밖에 안 찍었다. 뭘 더 하고 싶겠어. 산티아고까지 110km 남았다는 표지 보고 의욕이 생기기는 커녕 더 슬퍼진 순례자는 나밖에 없을 듯. 

 

그간 성당은 수도 없이 봤지만, 티로가 설명해준 양식대로 만들어져 있는 성당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저 정도면 병이 깊었다고 봐야지. 

 

가다가 멈춰 선, 유리문의 선팅 덕에 마을 이름을 알게 된 바로 그 알베르게. '길가에 있는 여행자 숙소 겸 바' 비즈니스 모델은 그때 이미 내 무의식을 점령했던 것 같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알베르게가 까미노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남들이 다 간다는 포르토마린을 눈앞에 두고 저 알베르게에 멈춰 섰다. (사실, 그날(4/6) 아침 수첩을 보면 그날의 목적지는 포르토마린이었다. 그곳에서 할 일들을 빼곡하게 적어 놓고는 나몰라라.)  

걷는 속도를 더이상 늦출 수는 없었다. 그러니 길 위에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려면 아쉽건 말건 기운이 펄펄 넘치건 말건 딱 멈추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날(4/6)은 종일 로자와 걸은 걸로 돼 있다. 수첩을 보니, 전날 만난 루이스와 로자에 대해 티로를 둘로 나눠 놓은 것 같다고 설명돼 있다. 비올라와 피아노를 능숙하게 다루는 루이스, 명상, 동양, 테라피에 관심이 많은 로자. 

로자는 사이코 테라피스트라고 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심리 상담가다.

 

지금부터 아래는 오늘(2016/5/22) 쓰고 있는 글. (아.. 이건 제정신 가진 사람이 하는 짓이 아니야.. 그래도 한줄한줄 쓸 테다. 기억력 없는 나를 위해.)  

 

4월 6일 저녁에 쓴 수첩에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추정되는 어설픈 짐작이 있다. 

예를 들자면, '여기서 이 시점에 심리상담가를 만난 것은 아직 남은 문제를 그와 함께 풀어 보라는 신의 계시다' 뭐 이런 식. 

티로가 스페인식 R 발음 못한다고 엄청 뭐라 한 직후에 발성 전문가인 신디를 만났었다. (티로는 내 R 발음을 가지고 처음에는 무지하게 놀리다가 나중에는 화를 냈는데, 내가 구강구조를 탓하니까 그건 순전히 내 게으름 때문이라고 맞받아쳤었다.) 여튼.

판초를 잃어버렸을 때, 하필 그때 바로 옆에 있던 성진이 자기가 갖고 있던 여벌의 판초를 나눠 줬었다. 

정말로 필요하다고 느끼면, 또는 정말로 필요하면 그게 사람이든 뭐든 어김없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니, 뭔가가(또는 누군가가) 눈앞에 딱 나타났다는 것은 내가 그 시점에 그것(또는 그 사람)을 절실히 원했기 때문인 걸로 끼워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쓰다보니 이런 식의 끼워맞추기가 나중에 문제가 된 것 같다. 나의 경험이며 나의 진실이며 나의 주장인 것을 다른 이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게 된 것.)

다시 여튼. 

수첩에는 산티아고에 가서 할 일들이 적혀 있다. 

순례자 사무실 가기, 파라도르 예약하기, 로마행 비행기 예약하기, 기념품 사기, 엽서 보내기 등.

 

그리고 뭐라도 된 양 수첩에는 "씻고 성경 읽고 명상하고 자자" 라고도 써 있다. 지가 언제부터 그랬다고. 나원참. 

 

이 날 하루 일을 기록하는 데 물경 20일이 넘게 걸렸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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