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에 시작됐던 나의 까미노 1기는, 든든한 보살핌과 소소한 간섭을 패키지로 제공하는 알렉스의 보호 아래 모든 예측불가능성이 선한 의지에 의해 차단된 채 보낸 열흘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그는 나를 위해 헌신했지만 나는 그 덕분에 안전하기도 했고 길로부터, 사람으로부터 고립되기도 했다는 말이다.

 

나는 충분히 안전했다. 스페인인인 그가 말하는 대로만 하면, 것도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로컬 주민들 눈살 찌푸리게 할 일도 없었고, 그래서 곤란한 상황에 빠질 일도 없었다. 한마디로 그는 친절하고 보수적이며 자상하고 엄한 아버지였다.

 

알렉스와는 열흘 정도 동행했었던 것 같다. 누구도 계획하지 않았지만, 3월 17일의 산토도밍고 이후로 나는 까미노 2기로 접어들었었고, 3월 25일에 길에서 폭우 세례를 받으면서 티로와 함께 걷던 2기도 대략 끝나가고 있었다.

 

3월 26일, 칼자딜라 데 라 쿠에자(calzadilla de la cueza)의 알베르게를 떠날 때, 나와 티로는 나름 쿨한 척 했다. 피차 함께 할 수 있는 미래가 없는 마당에, 더이상 바랄 것도 없었고 그래서 서로 요구할 것도 없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났고, 함께 하기에는 우리는 서로 너무나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칼자딜라 데 라 쿠에자를 떠나면서 다음에 만날 마을을 지정하지 않았다. 같이 있기 위해서 피차 속도를 조정하지 말고, 서로 다른 속도를 인정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거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 날 알베르게를 나오면서 공식적으로 헤어진 것과 다름 없었다.

 

전날의 폭우 세례를 받으면서 그간 내게 일어났던 평생의 모든 일들이 내 뜻과 관계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던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 또한 하늘이 알아서 보여 줄 거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지난 사진들을 보면서 사건을 유추하지 않고 그날의 기억 만으로 이렇게 말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면, 3년 전의 진심이 순간의 짧은 감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제, 그 날의 사진들을 보면서 매일 조금씩 옅어지고 있는 생각을 끌어 모으자면 다음과 같다. 아래는 아침의 사진이다. 전날과 비슷하게 흉흉하다. 물론 전날 구름은 검은 색에 더 가까왔다.

 

 

 

 

날씨는 계속 꾸물꾸물했다. 혼자 걷는 길은 스산하고 지루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티로랑 함께 걷는 날은 사진을 많이 찍을 수가 없었다.  2010년 3월 26일 금요일을 기록하는 사진은 참 많다.

 

이별을 예감했던 나는, 함께 했던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서 티로한테서 새롭게 배운 것, 티로가 자주 쓰는 말, 티로의 버릇 같은 것을 아침에 숙소에서 나오기 전에 수첩에 적었다. 명상, 침낭은 티로한테 배운 것, think, research, system, interesting, efficiency는 그가 종일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침낭은 땅에 죽 펴놓고 곱게 돌돌 말아서 전용 가방에 넣는 게 정석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조금씩 쑤셔 넣는게 시간도 적게 들고 침낭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한다.

 

우리는, 헤어지자니 서운하고 같이 가자니 점점 아파오는 길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따로 걸었다.

 

혼자 걷고 있는데 뒤에서 미국인 부녀와 친구, 그리고 그들과 함께 온 중국인 교환학생이 나를 앞질러 갔다. 인상착의를 말하며 티로를 보았느냐고 하니 뒤에서 따라 오고 있다고 했다. 티로도 혹시 나를 봤냐고 물었다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위치를 확인하면서 같이 가는 것도 아니고 따로 가는 것도 아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하군(sahagun)에는 내가 먼저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들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속도를 늦추었다. 8시 반부터 걷기 시작해서 사하군에는 3시쯤 도착했는데 더 못갈 만큼 피곤했고, 티로도 거기서 멈춰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길 옆에 있는 알베르게를 볼 때마다 "내가 티로라면 저기서 묵을까?" 하고 생각했고, 한 곳을 골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다였다.

 

알베르게에는 남미에서 온 매력적인 여자가 호스피탈레로로 근무하고 있었다. 체크인하는 곳에서 오스트리아에서 왔다는 루디와 베아뜨를 처음 만났다.

 

내가 체크인한 알베르게는 주빈을 위한 호스텔과 나같은 순례자를 위한 숙소가 따로 있는 곳이었다. 호스텔에는 길에서 만난 미국인 일행이 체크인했다. 숙소에 들어가지 않고 미적거리면서 티로를 기다렸다. 30분쯤 지나서 티로가 알베르게로 들어왔다.

 

암묵적으로는 진작에 이별한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지 않았었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있는 곳으로 그가 온 것이 고맙고 신기했다. 숙소에는 방이 여러 개 있었다. 이미 진작에 비공식 연인 모드였던 우리였고, 그 때는 각자 갈 길이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된 우리였지만, 숙소 배정만큼은 우리 몫이 아니었다. 남미 여자는 척 한번 우리를 훑어보더니 원래 여자 방 남자 방이 따로 있는데 요즘은 손님이 적으니 둘이 그냥 같은 방을 쓰라고 했다. 난처한 듯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지만 티로는 "뭐, 그럼 할 수 없지." 하며 안내하는 여자를 따라 숙소로 들어갔다.

 

그래서 우리는 적은 돈에 화장실까지 딸린 2인용 침실에 묵게 되었다. 것도, 침대 여러 개 중에 두 개를 점유한 게 아니고 침대가 딱 두 개 있는 방으로 인도되었다.  

 

아래 사진은 묵었던 알베르게의 입구. 매점 겸 리셉션이다. 그 아래는 오스트리아에서 왔다는 루디.

 

 

우리는 어색한 가운데 짐을 풀고 밖으로 나갔다. 술집에 가서 먹고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동안 어색함이 좀 사라졌다. 열 두시가 넘어서 알베르게에 갔더니 문이 잠겨 있었다. 불 켜진 방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근무하는 사람은 다 퇴근한 것 같았고 순례자들은 다 잠이 든 것 같았다. 티로는 나에게 담을 넘어 가서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니가 넘어가서 니가 문 열어." 라고 했더니 자기는 덩치도 크고 남자라서 혹시 누가 보면 도둑으로 오해할 수 있으니 내가 담을 넘는 게 맞다는 거였다. 담을 넘어 간 다음에 나는 바로 문을 열어주지 않고 장난을 쳤다. 한참을 웃다가 같이 숙소로 들어갔다. 술기운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으나 우주가 만들어 준 기회로 인해, 우리는 그날 세 번째로 함께 잠을 잤다. 위험을 무릅쓴 채로. 왜냐하면, 우리가 잠든 방은 문을 잠글 수 없게 돼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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