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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그 때 하루가 1년처럼 지나가더라니. 하루를 기록하는 데 꼬박 1년이 걸리고 있다. 

그러니, 나는 제대로 하고 있다. 

미리 들춰본 6년 전의 4월 21일에 나는 참 행복했다. 이 추세라면 15년 뒤에야 기록되겠지만. 

지금은, 매달 한 통의 이별 편지를 쓰고 있다. 


사진을 보고 있자니, 당연한 말이지만 마을 이름과 풍경이 낯설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 여기, 여기선 이런 일이 있었지' 했었고, 알베르게의 화장실이며 침대가 놓여 있던 거며 다 기억 났었는데. 



2010년 4월 3일은 길을 걸은지 27일 되는 토요일이었다. 

길을 걷다가, 걸음이 빨라서 훨씬 더 멀리 갔을 것으로 생각했던 마르셸을 만났다. 


어쨌건. 

티로는 뒤에 남겨져 있고, 남은 길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내심 최선을 다해서 천천히 걸어가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15km 쯤만 걷고 멈추고 싶었는데, 아무리 천천히, 아무리 놀면쉬면 걸어도 20km 이상은 계속 걷게 되었다. 

이 날은, 돌아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있다. 

"공부를 한다면? 여성학 사회학 철학 역사..." 등등의 리스트 아래에 주역, 불교가 있는 것이 흥미롭다. 


루이테랑의 알베르게에서는 직전 마을에 묵을 것으로 생각했던 엘렌과 디니 모녀를 만났다. 

걷는 동안 느낀 거지만, 누가 어디에 있을 거라는 예상은 늘 빗나간다. 


지금은 내가 거기를 대체 왜 갔는지 완전히 까먹었지만, 그때는 이렇게 써 있다. 


이제 알 것 같다. 여기까지 왜 왔는지. 

굳이 여기까지 와서 흔적을 남긴 성 야곱을 원망하면서 걷던 초반을 지나고 

뒤에 남겨지기 싫어서 30-40km씩 강행군을 하던 중반을 넘고 나니 지금은 오히려 걸음을 늦추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분홍신이 미쳐 날뛰고 있다. 

지금 생각으로는, 그날 걸을 분량을 이미 다 걸었다면 단 한 발도 더 갈 수 없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춥고 피곤하고 지쳐서 막 알베르게에 도착했더니, 바로 다음 마을에서 예수가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절대 못 간다에 내 남은 온 시간을 걸 수 있다. 


이 때쯤 순례자들 물갈이가 있은 모양이다. 

동네 벽이나 표지판에 스페인 이름보다 영어식 이름이 더 많이 눈에 띄었다고 써 있다. 

진작부터 써온 친구들은 쓰다 지쳤거나 중간에 돌아갔을 것이고, 새로 온 아이들은 들뜬 마음에 계속 흔적을 남겼을 테지. 


이 날은 3시가 되기 전에 루이테랑에 도착했다. 

마르코를 만난 모양인데 사진 찍을 새도 없이 훌쩍 가버렸다고 한다. 마르코와 같이 걷던 로는 어디로 갔는지 묻지 못했다. 

같이 와서 끝까지 같이 가는 이들도 있고, 혼자 와서 같이 가는 이들도 있고, 같이 와서 혼자 가는 이도 있다. 


그날 있었던 일 몇 가지 기록하고 나서, 다시 '돌아가서 할일' 정리 모드다.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아서인 것 같다. 

여행 사진 정리해서 메일 보내기, 골라 놓은 책 읽기, 영어학원 등록하기, 회사에 가서 작별인사하기, 주역 공부하기, 생계 준비하기, 개인 명함 만들기, 회사 책상 정리하기. 

지금 보니 참 뿌듯하다. 책 읽기, 개인 명함 만들기 빼고는 거의 다 이루었도다.


당시 회사 사람들이 4월 14일에 밀라노로 출장을 간 모양이고.. 

1927년생으로, 순례길에서 2005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수첩에 적혀 있다. 


루이테랑의 알베르게는 전반적으로 유쾌했던 기억이다. 처음 만난 이들이 많았는데 계속 웃느라 배가 아팠다. 

이런 식이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항상 다음날 체크아웃 마감 시간을 묻는다. 아침에 짐 싸고 밥 먹는 시간을 알맞게 배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으면서 언제 나가면 되냐고 물었더니 주인장 둘 중 하나가 대답했다. as soon as possible.

내가 막 웃으니까 다른 주인이 9시라고 알려 주었다. 

처음에 대답했던 주인이 정색을 하고, "오늘 9시야. 나가." 뭐 이런. 


이날, Andre, 그리고 피네스테레까지 동행한 Jean Pierre를 새로 만난 건가? 

여튼, 일별로 날짜를 계산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이 날부터였던 것 같다. 

남은 날들을 쭉 적고, 그 밑에 예상되는 목적지를 적어 놓는 식이다. 매일 아무리 정교하게 계산해도 매일 예상을 빗나가는, 하나마나한 취미 생활, '계획 짜기'. 



하도 오랜만이라 표지판 한번 올려 봤다. 어인 일인지 순서가 자기들 마음대로 뒤죽박죽이 됐다. 하늘의 뜻인 걸로. 


이날의 하늘도 하루에 만번쯤 변했다. 것도 뭐, 한 6년 있으니 다시 변화에 무감해지기는 하더라만. 


디니, 그리고 엘렌. 잘 가던 티로를 엘렌이 붙잡지만 않았어도. 책임을 물을 수도, 그렇다고 고맙지도 않다. 


여기가 어딘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딱히 슬프지는 않다. 좋은 기억이 사라진 것처럼 나쁜 기억들도 사라졌을 것이므로. 


예쁜 동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겠다. 




슬슬 지겨워지는 호리병.


사진이 뒤죽박죽이 되다니. 무슨 조화일까. 


방명록에 저 따위로 글을 써 놓다니. 좀더 결정적이고 감동적으로 쓸 수 없었냐 말이다. 


4.3 항쟁이 일어난 날이로군요. 

날이 갈수록 산티아고로 가는 발걸음을 늦추고 싶습니다. 

꼭 죽을 날 받아 놓은 것 같아요. --;

그렇지만 뭐, 길은 길일 뿐이니까요. 

그간 널어 놓은 것들 하나씩 주워 담고, 버릴 건 버리면서 끝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27일간 무사고로 여기까지 온 것, 걱정해주고 염려해주는 많은 분들 덕인 것 압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many thanks for praying for me. 



이 때만 해도 다치지 않고 걸을 수만 있어도 뜨겁게 감사하고 행복해 했구나. 이 때만 해도. 

Posted by 微物의 숨소리
TAG 까미노

이러다 한동안 또 덮어 놓다가, 두고 볼 것도 없이 앞으로도 이런 식이겠지. 


한때, 강한 동기와 목표의식을 가지고  아무리 노력해도 일이 안 되길래 

목표를 잊고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자세로 살면 안 되던 일이 될 줄 알았다. 순진하게도. 

그래서 한동안 실제로 아무 생각 없이 살기도 했는데, 그런다고 또 뭐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초심자의 운 때문이었는지, 삶의 자세를 180도 바꾸고 나서 아주 잠깐, 들인 노력에 비해 보상을 많이 받기도 했는데, 오래 가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목표를 잊은 게 아니라 잊은 척 한 거였다. 

!!!


계획을 치밀하게 세운다고 해서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내 그럴 줄 알았지' 하며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고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뜻'이라는 것이 있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하더라도 나의 원래 뜻과는 다른 결과가 나온다. 

그러니 더욱 결과에 초연하기로. 

(음. 나의 순례기는 내가 세상에서 없어져지만 끝이 나겠군.)


여튼. 

그새 많은 일이 있었다. 5년 전의 순례도 진작 끝났고, 티로의 생일도 지나갔다. 

티로를 만날 때마다 하던, 생리도 끝나가고 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거지? 오늘은 노동절이고 나는 사무실에 앉아 있다. 


폰 페라다에서 비야프랑카델비에르조로 떠난 날은 2010년 4월 2일, 금요일이다. 

휴일 같지만, 마침 오늘도 금요일이다.  

티로를 못 만난 지 5일째로 접어들었고, 샤나, 엘렌, 디니는 거의 매일 하루에 한 번 이상 만난 것 같다. 


이 날은 웬일로 몹시 착했던 하루였다. 

수첩 한 가득 잘못했던 일들을 적고는 '반성한다'고 써놓았다. 

제일 먼저, 엄마한테 못되게 군 것을 엄청 반성한다고 써 있는데, 음, 지금도 그러고 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것은, 반성 철회. 그 때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에너지와 시간과 돈을 과소비한 것은, 음, 한동안 반성 모드로 살았는데 최근 들어 소비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안 그럴 수 있었으면 안 그랬겠지. 내가 악당도 아니고. 

내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는, 지금 시점에서 보면 내 몸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으로 바꾸어서 반성하고 싶다. 


며칠 동안 티로를 못 봤는데, 보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버벅거리다가 중요한 말들을 까먹게 될까봐 

수첩의 다음 장에는 티로를 만나게 되었을 때 해야 할 말들을 적어 놓았다. 

가우디 이야기, 사업 이야기, 치유하는 방법, 취향, 선입견, 명상, 복권, 그리고 사과하기. 

지금 보니 그렇게 중요한 주제들도 아니구만. 

늘, 매일, 티로와 다시 만나게 되면 나눌 이야기들을 적던 시간들. 

가장 눈에 띄는 말은, "할 말을 이미 다 나누어서 더이상 할 말이 남아 있지 않다"라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세상에 나가서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겠다"에 대한 나의 의견. 

얼마나 많은 사람을 치료할 것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 명을 제대로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 한 명은 바로 자기 자신. 


엄마 아빠 문제가 이 날 좀 풀린 것 같기도 한데, 시간이 지나 별 무소용이 되었다. 

둘다에게 착하고 싶었고 평화를 좋아했던 나는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싫었다. 

싫었던 것의 근원에 있던,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서 묵은 내가 나는 사랑이 있었다. 

수첩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무엇이든. 내 의지, 내 선택, 내 행동의 결과다. 피해자인 것처럼 굴지 말자." 

어떤 것이든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는 그 때의 생각에는 지금도 동의한다. 

떼를 쓸 일이 아니다. 



아래 사진은, 아무리 작은 마을을 가도 꼭 있는 부활절 퍼레이드, 세마나 산타. 






어느날 티로와 걸을 때 무지개를 본 다음부터, 무지개가 특별해졌다. 


빈 교회에 들어가 봤더니 세마나 산타에 쓰이는 각종 소품과 가마와... 솔직히 좀 그로테스크했다. 



흔한 풍경들. 다른 계절은 어떤지 궁금하기는 하다. 





웬만큼 더러움에 익숙한 내가 기겁을 한 컴퓨터와 키보드. 해도해도 너무했어. 

지금도 그 감촉이 생각난다. 키보드를 두드릴 때마다 손가락 끝에 쩍쩍 달라 붙는.

Posted by 微物의 숨소리

신이시여. 이 빌어먹을 우연에 제가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게 하소서. 

2010년, 시간이 멈춘 이래 앞으로 나가지도, 지난 일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로 옴짝달싹 못하고 갇혀 있다가 

재작년인가, 하는 데까지 해보자 하고 하루하루 정리하다가 세상의 시간에 금세 추월당하고는 다시 넋을 놓아버렸었다. 

다시 기억해 내지 않으면 안되는 일들, 점점 희미해져 가는 사람들, 생각들, 느낌들이 

몇 년째 안에서 차오르다 차오르다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도저히 꺼낼 수가 없어서 모른 체 했더랬다. 


코엘료의 책들을 읽던 도중, 정작 초기에 그를 유명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순례자를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마도 3월 초였었다. 

하루면 도착한다고 안내돼 있었는데, 다른 책들 때문인지 이틀이 가고 사흘이 가도 오지 않았다. 

마침내 책을 받아든 날은 공교롭게도 3월 6일. 5년 전의 거사(!)가 있었던 바로 그 전날이었다. 

이건 무슨 조화인가, 하고 잠깐 생각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그냥 털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그냥 지나가지만, 내 언젠가 소설 속의 지명과 의례들을 나의 기록 위에 얹어 볼 테다.) 


어제(3/30), 손님을 집에 들여야 해서 여기저기를 정신 없이 치우던 중 

책장에 놓여져 있던 까미노 기록 3종 세트(수첩, 알베르게 안내 종이, 안내 책자)를 발견하고 무심히 가방에 넣고 집을 나와서

사무실 책장에 아무렇게나 넣었었다. 


긴박한 사건사고가 터지는 와중에 오늘 하루에만 철지난 이야기들에 대한 포스팅들을 숙제하듯이 쏟아내고,

막 책상을 정리하려다가 여행 기록들을 적은 포스팅을 보게 됐다. 

책장 안에 넣어 둔 수첩을 꺼내 든 것은 정황상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년 전의 기록은, 매일 조금씩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다가 하필 3월 31일을 마지막으로 끝나 있었다. 

이 정도 우연에 흔들리기에는 그간 겪은 경험이 아깝다. 

그렇지만 등골이 오소소 떨리는 것은 사실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이 이렇게 되려고 이러는 건지, 집 컴퓨터를 백업한 외장하드를 사무실 책상 서랍 안에 넣어 둔 것이

생각났다. 


이상한 우연에 각종 보조기억 장치와 관련 이미지까지 구비되어 있으니 더이상 물러설 수 없을 것 같다. 

매년 사순과 부활을 지내면서 겪었던 마음 고생에 비하면, 묵은 기억을 불러내는 일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5년 전 오늘, 나는 라바날 델 까미노에서 있었다. 라바날에 도착했던 그 날 비가 왔던 것처럼, 오늘도 비가 오고 있다. 

이미 지난 일에 주책 없이 가슴이 다시 아플까봐, 차마 다른 포스팅들을 들춰보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써내려갈 것은 2010년 4월 1일, 라바날에서 폰페라다까지의 33km, 9시간 반을 걸어간 기록이다. 

전날 눈이 와서 길에 눈이 많이 쌓여 있다. 이 날은 크루즈 데 페로에 간 날이다. 

다들 십자가 아래에 무언가를 묻는다고 들었는데, 소중한 걸 묻는 건지 버리고 싶은 걸 묻는 건지 그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혼자 오랫동안 걷게 돼서 아무도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수정, 엘렌, 디니, 마르코, 로를 만났다. 

지금껏 만났던 50-60명 중 5-6명하고만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는 것을 보면, 만나게 돼 있는 사람만 만나게 돼 있는 것 같다. 


이날은, 까미노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등장한다. 

가족처럼 매일 만나는 것이 당연해 진 사람들을 언젠가부터는 다시는 못 보게 될 텐데, 그 어색함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장 지금, 5년이 지나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4월에 오는 눈 따위, 하나도 안 신기하다. 하루에 봄여름가을겨울을 다 겪게 하는 희한한 날씨다. 


루즈 데 페로에 도착할 때까지, 뭘 묻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을 하고 나니, 마치 연극 대본을 받아든 배우처럼 망설임 없이 무언가를 묻었다. 

여전히, 가장 소중한 것을 묻는 건지 가장 버리고 싶은 것을 묻는 건지가 불확실한 가운데, 나는 나를 묻었다. 

명함 하나를 꺼내고, 노란 재생지로 싸서는 돌 아래에 두었다. 

처음에는 명함이 고작 직딩 19년밖에 의미하지 않으니 명함에 내 삶 전체를 담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었지만, 

그 날까지 살아온 삶의 결과이자 총화라는 생각이 나서 가차 없이 묻었다. 


다시 시작하자. 


라고 쓰여 있다. 수첩에. 

나는 그 때까지 그 모습으로 살아온 내가 정말 싫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흥, 이제 너 정도 크기는 안 무서울 때가 됐다고!' 하면서도 행여 눈이 마주칠까 슬금슬금 피하게 되는. 


고이 잠드소서. 오늘도 그 앞을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도 평화. 


산 하나만 넘으면 동네 그늘진 곳에도 눈 한 톨 없는 이런 날씨, 이제 하나도 안 신기하다. 




마을 이름과 알베르게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는, 양면 인쇄된 A4 용지는 이제 1/4밖에 남았다. 

5년간 내 발목을 붙잡고 있던 이 길도 이제 곧 끝이다. 정말로, 끝. 끝. 끝. 


폰페라다 도착. 짐을 풀자마자 동네 성으로 올랐다. 33km 걷고 나서 동네를 돌아다니다니. 지금 생각하니 제 정신이 아니었다. 


젠장할, 망할 쌍무지개 같으니라고. 

티로와 걷던 시골길에서 보았던 선명한 쌍무지개가 생각나 버렸다. 5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Posted by 微物의 숨소리

3월 31일 수요일, 아스토르가(astorga)에서 라바날 델 까미노(rabanal del camino)까지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22.7km를 걷고 하루를 마감했다. 아스토르가의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몇몇 순례자들이 사람들 소식을 전해 왔다. 우리가 레온을 지날 때쯤 순례자들 사이에 설사병이 돌았다고 했다. 마실 수 있다고 써 있는 길가 샘물을 마신 사람들이 줄줄이 탈이 났다는 소식이었다. 문제가 생긴 사람들 이름 중에는 진과 마르코도 있었다. 티로 소식은 수정에게 들을 수 있었다. 어디선가 동행을 했는데 아시아 여자를 보면 말을 걸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아마도 그는 "네 짝은 동양 여자다"는 계시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한참 지나서 들은 거지만, "미친 동양 여자를 거두는 게 자기 운명"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기는 하다.

 

이 날 일은 별로 기억나는 게 없다. 그때는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머리 속은 온통 티로 생각 뿐이었다. 사진을 봐도 6시간 동안 구름 한점 없이 맑았다가 흐렸다가 다시 맑았다가 하면서 하늘이 버라이어티 쇼를 했던 것만 있다. 수첩을 보니 흠. 좀 흥미로운 게 있군.

이 날은 24일차였는데, 수첩에는 "길 위에서 마치 23년을 산 것 같다."고 써 있다. 하루가 1년처럼 길었다는 뜻도 되지만, 1년에 한번, 아니 평생에 한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일들이 단 하루 만에, 것도 거의 매일, 일어나는 곳이었다, 그 곳은. 사방이 뻥 뚫린 곳에서 하루를 보내다 보면 별별 해괴한 경험을 하거나 보게 된다. 그리고는 알게 된다. 단 하루, 24시간 동안 모든 것이 일어나고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다는 것을.

까미노가 끝나고 나면 예전의 자기와는 전혀 다른 자기를 만나게 될 거라는 말을 누군가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저 계산법에 따르면, 30세에 시작해서 35일을 걷고 나면 길 끝에 65세의 노인이 서 있는 식이니, 그럴 법도 하다.

 

수첩에는 또

*생계 유지

*가치 있는 일

이라고 써 있다. 나름 2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한 터라, 먹고 사는 문제가 엄청 걱정이 되긴 됐었나 보다. 아빠는, 마흔 두 살이 되던 해에,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바로 그 해에 꽤 오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은연 중에도 나는 아빠보다는 오래 회사를 다녀야 할 것 같았었다. 2010년에 나는 마흔 셋이었다.

 

라바날의 알베르게에서는 아마도 페드로와 플로리안을 만난 것 같다. 그들의 이름 밑에 "얼마나 더 걸어야 보고 싶은 사람을 우연히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라고 써 있다. 나는 나만 보는 내 수첩에다가도 "티로가 보고 싶다"라고 쓰지 않았다. 그냥, 소식을 들을 수 없어서 걱정 된다고, 어디 있는지 궁금하다고 쓴 게 다다.

 

조금씩 기억이 나기 시작한다. 저녁에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들으러 성당에 갔었는데, 아마도 그 날은 성가를 부르지 않는 날인 것 같았다. 미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는데 노래 비슷한 건 한 마디도 못 들었다. 아마도 엉뚱한 성당을 갔거나, 아마도 날이 정해져 있거나 했겠지. 성당 밖으로 나갔을 때는 그냥 맞기에는 좀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순례자들은 성당 처마 밑에 오종종 모여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티로와 헤어진 지 나흘째가 되자 별별 생각-이 자식이 나를 일부러 피하는 게 틀림 없다, 설사병이 났나 따위-이 다 들었던 나는  마음이 울적해져서 쏟아지는 비를 그냥 맞으면서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날은 아마도 크루즈 데 페로에 가는 날인 것 같다. 수첩에 무엇을 묻어야 할까 하고 묻고 있다.

 

아래 사진들은 6시간 동안 펼쳐진 라이브 구름 쇼와 기타. 길바닥이 뭘로 만들어졌는지, 비가 와도 질척거리지 않고 해가 나면 또 금방 말랐던 것 같다.

 

 

전날은 그냥 구경만 하고 지나갔었는데, 이 날은 화살표 아랫부분을 조금 손질(아니 발질)해 주고 갔던 기억이 난다.

 

 

 

 

 

 

 

 

 

 

Posted by 微物의 숨소리
TAG 까미노

2010년 3월 30일 화요일, 걸은 지 23일째 되던 날에는 아침 8시 30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7시간 동안 16km 간 다음에 더이상 가지 않고 멈추었다. 분명히 뒤에서 걷고 있는 건 확실한데,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아무리 못해도 지난 사흘간 최소한 한두 번은 마주쳐야 하는데 마주치기는 커녕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던 티로와의 거리가 더 벌어질까봐 빨리 걸을 수 없었다, 고 생각한다. (그때는 그걸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는 말이다.) 바에서, 혹은 알베르게에서는 아는 사람을 만나건 모르는 사람을 만나건, 아~주 오랜 시간을 전반적이고 무난한 순례 이야기로 보낸 다음, 내가 아는 누구를 혹시 그도 아는지, 우리가 서로 아는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소식을 물었고, 티로는 차례차례 이름 불리워진 순례자들의 맨 마지막에서 두어번 째쯤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튼. 30일 아침에 바이커들이 자전거를 점검하는 동안 나는 먼저 숙소를 떠났다. 1시간이 좀 안됐을 때, 뒤에서 바이커 하나가 나를 불러세웠다. 전날 호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의 바에서 라바날의 그레고리안 성가를 적극 추천했던 호세루(Joseluis)였다. 자전거를 급히 세운 호세루는 내게 다짐하듯 물었다. "어제 내가 말한 거기가 어디라고?" 내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호세루가 말을 이었다. "라바날이야. 아스토르가가 아니고." 

아니, 그 말을 하려고 그 아침에 혼자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 거야?

바람처럼 사라져가는 호세루의 뒷모습을 보며, 한참을 울었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문을 열라고 열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조금 연 문틈으로 사정 없이 몰아쳐 대던 인간은 나몰라라 하고 떠나 버렸고, 정작 조건 없이 호의를 베푸는 낯선 이들에게서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 그 상황이 대책 없이 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마워, 호세루. 고마워, 필리. 고마워, 카누토. 고마워, 이케. 고마워, 밀리.

 

사진을 보니 이날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난다. 이상한 상징물들을 지나서 언덕을 올라갔는데 창고처럼 생긴 집이 뜬금 없는 곳에 있었다.

바인가 하고 들어가 봤더니 아무도 없었다. 창고 같이 생긴 안은 넓고 어둡고 추웠는데, 구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웬 거지 차림을 한 남자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나 나왔다. 여기는 뭐하는 데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그냥 거기 살고 있고, 필요한 건 밖에 있으니까 알아서 먹고 알아서 돈 내고 가란다. 초록색의 간이 포장마차 안에 커피며 쿠키며 등등이 놓여 있었다. 먹고 싶은 것도 마시고 싶은 것도 없어서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화장실을 가야하나 하고 잠깐 생각했는데, 아무 것도 안 보태고 화장실을 쓰는 게 좀 미안해서 그냥 나왔다.

그리고 결국, 저 집을 나와서 30분쯤 걷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노상방뇨'라는 것을 했다. 그간 티로와 함께 있으면서 몸에 밴 'why not.' 정신으로. 기분이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까미노 노상방뇨 이야기는 여기저기에 가끔 나온다. 방광은 터질 것 같고, 화장실은 없고, 어쩌라고.

 

걷다 보니 갈림길이 나왔다. 허허벌판이었는데 화살표가 없었다. 앞뒤로 사람은 없고, 어찌할 바를 몰라서 멈춰 섰는데, 길 위에 순례자들이 자갈로 만들어 놓은 화살표가 보였다.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 놓았을. 바람에 자갈들이 잠시 흐트러졌더라도, 뒤에서 걷던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뒤에 올 다음 사람을 위해 다시 가지런하게 정돈해 두었을. 눈물이 솟구쳤다. 이렇게 뒷사람을 생각하는 마음들이 모이고 모인 곳이니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은 거겠지.  

 

멀리 마을이 보였다. 20일 쯤 걸으면 눈으로 거리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앞에 보이는 집들은 약 2km 떨어져 있으니 기어 가도 1시간이면 통과하게 될 것이고 멀리 보이는 집들은 4~5km 떨어져 있으니 천천히 걸어도 1시간 반이면 족할 것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가니 '오아시스'라는 이름의 바가 있었다. 티로와 함께였다면 '오아시스인데 당연히 목을 축이고 가야지'하며 들어갔을 것 같아서,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세 시간을 기다렸는데 티로는 커녕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래 사진은 길 한 가운데서 딱 마주친 강아지. 서로 한동안 기싸움을 하다가 내가 먼저 봐 줬다.

 

아스토르가(astorga)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더 걸어갈 수 있었는데, 그냥 멈추기로 했다. 가우디가 지었다는 건축물도 보고 싶었고, 티로 소식을 듣고 싶기도 했다. 아래 건물은 아마 시청 쯤 됐던 것 같다.

 

저기 아래에 단단하게 지어진 건물이 가우디의 작품이다. 바르셀로나에서 봤던 것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뭐지? 좋은 건지 그냥 그런 건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티로였다면 뭐라고 했을까. 티로였다면, 티로가 있었다면. 젠장할.

 

 

숙소에 체크인을 하는데, 순례자나 마을 사람들이나 모두 조금씩 들떠 있는 것 같았다. 몇 시에 무언가를 한다는데, 모르는 단어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몇 시가 되기 전에 카메라를 들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앞에, 내가 좋아하는 체구의 남자가 특이한 복장을 하고 걸어가고 있었다. 해질 무렵이었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조금 기다렸더니, 그 무슨 행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제사 그들이 흥분해서 말한 단어가 '프로세시옹'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을 사람 대부분으로 추정되는, 엄청 많은 사람들이 정해진 복장을 하고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레온에서 보던 것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뒤늦게 알게된 거지만, 스페인의 웬만한 마을들에서는 부활절을 앞둔 몇일간을 '세마나 산타'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계속 저런 행진을 한다고 한다. 나야 처음 보는 광경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매일 해야 하는 사람들은 매일 똑같이 의례와 행진에 전념할 수 있을까 싶은데, 그들은 매일 진지했고 매일 최선을 다했다.

 

아래는 수첩에 적혀 있던 내용들.

 

1층 침대만 있는 숙소, 오랜만이다. 너무 좋다. 나가서 필요한 것들 좀 사고 박물관에 가야지. 그 전에 맥주 한잔.

세상 일 참 뜻대로 안 된다. 병 고치러 왔다가 병 나서 가겠다. 최진영은 또 왜 그랬을까.(이 날 그의 자살 소식을 전해 들었다.) 호세, 마르코를 알베르게에서 만났다. 샤나, 엘렌, 로 등은 중간 갈림길에서 좀더 돌아오는 코스를 택했다고 한다. 나는 걷는 것을 싫어하니까.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알베르게에 묵었다가 피네스테레에 갔다가 다시 산티아고로 가서 파라도르에서 묵어야지.

메신저들에게. 나는 잘 있다고 전해 주시길.

한국에서 온 여자를 만났다.

버프를 샀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하는 수 없다.

티로를 만나면 나눌 이야기들 : 어린이(티로는, 뭘 할 건지 정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유난히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곰곰 생각한 끝에 나는 아이들과 같이 노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화살표 사인이 주는 의미, DBEW, 동북아시아, 개, 박물관, 교회, 십자가, 그리스도, 샐러드, 참치, 요플레, 바나나, 별자리, 음양, 먹는 순서, 정기신, 명상 등.

(반은 알겠고, 반은 모르겠다.)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깜짝 놀랐다. all by myself를 부르고 있었다. 나오는 노래 하고는. 라바날 지나서는 뒷일 생각하지 말고 가능한 한 많이 걸어야겠다. 9시부터 6시까지 9시간 동안 3km를 걸으면 하루에 27km를 걸을 수 있고, 그러면..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시간이.. 3월 30일에서 17일을 더하면.. 4월 중순.. 

 

길에서 만난 그들의 직업은..

재무 컨설턴트, 방송인도 있었지만 소방수, 경찰, 정원사, 간호사, 학생, 그리고 대부분은 실업자, 빈민. 한 순례자가 자기 직업을 자랑스럽게 'gardener'라고 말할 때 깜짝 놀랐다.

 

수퍼에서 참치 사고, 요플레 사고, 와인을 사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Jin과 Thilo 덕에 수퍼에서 무언가를 살 수 있게 됐는데. 둘다 대체 어딨는 거니? 산티아고로 계속 걷지 말고 여기서 딱 멈춰 버린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계속 걸을 수 있었지, 물론. 그렇지만 계속 걷는 것보다 그쯤에서 그만 두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아서 그냥 멈췄을 뿐이야." 하고 친구들한테 말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니,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남들 다 가니까 나도 갔어야 하나? 다시 까미노와 인생을 비교하게 된다.

셀레스티노와 호세를 만났다. 호세는 길에서 만난 한국인 여자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징표를 보여 주면서 "이랬었는데, 이게 사랑이 아니라고?"하며 내게 거듭거듭 물었다. 나는 그만, 같이 얼싸안고 울고 싶어졌다.

빠리로 가는 저가 항공을 누군가가 알려 주었다. Girona? 라고 써 있는 공항에서 빠리까지는 100유로면 된단다.

 

(그리고, 수첩에는 그간 만났던 순례자들의 이름이 죽 써 있다.)

Annie, Chris, Christian, Suzan, 오츠카, Alex, Aulelio, Florian, Omori, Alan, Diny, Ellen, Yoerg, Kike, Ro, Marco, Laszno, Genaro, Carlos, Claudia, Thilo, Diana, Holgut, Rene, Nora, Laura, Pedro, Shanan, Jin, Adrian, Inge, Maro, Francois, Rudi, Biati, Rudi, Fangyang, Jennifer, Pili, Canuto, Mili, Joselu, Iker, Cyndi, Jose.

(반은 알겠고, 반은 모르겠다.)

 

알베르게의 1층 거실에서 그날 새로 만난 순례자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신 나는, 그들과 몹시 친해져서는 꼭 서로 사진을 교환하기로 하고, 메일 주소와 전화번호를 주고 받은 다음 잠이 들었다. 아마도 이 알베르게에서 다시 알렉스를 만났던 것 같다. 얼굴 못 본지 열흘도 넘었지? 건강하게 계속 걷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길 위에만 있으면,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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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며칠 열심히 따라잡으려 했지만 역시. 기운 딸리는 일이었다. 3월 29일 레온에서부터 매일매일 조금씩 전진해서 산티아고까지, 그리고 산티아고에서 피네스테레로, 피네스테레에서 다시 산티아고로 걸어 가는 어느 지점, 4월 중순의 어느 날까지의 일기는 거의 매일 똑같다.

 

오늘은 2013년 4월 11일. 전날 한차례 푸닥거리를 끝내고 낮잠을 7시간 반을 잔 덕분에 밤을 꼴딱 샜다. 2010년 4월 10일에 어디 있었나 수첩을 찾아보니. 그날은 마침 산티아고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벌써 그렇게 됐구나. 프랑스와 체코를 오가며 사는 여행자와 5일을 시시덕거리며 지내는 동안. 추스리고 일상에 몰두하는 동안. 모처럼 사방에 신경질을 뿌려 대는 동안. 어제는 광분해서 퍼붓느라고 오후에는 거의 기절 상태에서 잠에 들었다.

 

앞으로 당분간은 말을 더 보태지 않겠다. 수첩에 있는 키워드들만 문장으로 만들어 옮겨 놓기로.

 

2010년 3월 29일 월요일-아는 순례자가 아무도 없는 작은 마을인 호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에서 자전거쟁이 남자 다섯과 한 방에 잠.

죽자고 걸어서 33km나 왔다. 대인기피증인 것 같다. 아는 순례자들을 만날까봐 땅만 보고 걸었다.

밥 먹을 때 테이블에 왼팔 얹지 말기. 돈데 에스따 엘 까미노? 하루종일 죽어라 연습해도 안되는 스페인 r 발음. 연습이 부족해서 안되는 거라며. 해도 안된다 이 자식아.

(종일을 그렇게 티로가 남긴 흔적과 함께 걸었다.)

내일도 멀리멀리 가야지. 까미노가 덜컥 끝나면 하루 종일 뭐하고 사나. 화살표도 없는 곳에서.

*not being organized. 앞으로 견지할 자세.

*purpose of life. 나는 뭐를 하겠다고 세상에 나온 걸까.  

음식을 남기게 될 때마다 티로가 생각난다. 곧바로 돌아온 습관. 새로운 음식을 시도하지 않고 스파게티를 시킨 게 잘못이다. 빌어먹을 썸머 타임.(레온에 들어간 날, 그 유명하다는 레온 성당에서 그 유명하다는 미사를 구경하려고 했었는데 하필 3월 28일부터 썸머 타임이 시작돼서 놓쳤다.)

이렇게 꾸역꾸역 먹어대니 하루에 30키로를 걷는들 살이 빠지겠나. 와인도 혼자 마시니 맛대가리가 하나도 없다.

길에서 신디를 만났다. 생각이 깊고 밝은 여자였다. 오늘 출발했다고 했으니 잘하면 20키로쯤 걸었겠다.

다섯 바이커와 바에서 술을 마셨다.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주고받았다. 한 바이커가 라바날 델 어쩌고 하는 데 가면 그레고리안 성가가 유명하다고 수첩에 메모해 주었다. 디저트로는 나틸라스?(natillas)를 꼭 먹어 보라고 한다. 바닐라 크림이란다.

 

사진을 올리려고 보니 또 말을 보태고 싶다. 참자. 잊어먹지 않기 위해 캡션만. 곧 나가야 할 시간이다.

 

전날 묵은 레온의 알베르게 입구. 새벽에 나서면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유서가 깊다지.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레온 성당. 전날 저길 갔었어야 해.

 

앞에 디니와 엘렌이 걸어간다. 마주치기 싫어서 걷는 속도를 급히 늦추었다.

 

레온의 파라도르. 수도원이었나 병원이었나 궁전이었나. 셋 중 하나였는데.

 

 

저 멀리 길건너 표지판에는 산티아고까지 도로로 324km 남았다고 써 있다. 어느새.

 

누히 말하지만 극단적으로 맑다가 극단적으로 흐려지면서 하늘이 점점 세를 넓혀가는 흐린 부분과 여전히 맑은 부분으로 딱 쪼개지던 그날은 이 사진에서 먹구름 색이 제일 짙은 부분보다 더 시커맸더랬다. 너무 경황이 없어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것이 천추의 한이다.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었던 곳부터 순식간에 몰려오기 시작했던 먹구름은,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내는 데 걸렸을 시간보다 훨씬 짧았을 것 같다.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사람은 아마도 믿지 못할 것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 다리 아래 흐르는 강 이름이 오르비고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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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13년 3월 30일)도 낮잠을 두 번 자는 바람에 시간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렇지만 괜찮다. 졸리면 자면 되고 눈 떠지면 일어나 움직이면 된다. 어차피 내일은 할일이 많아서 딴 짓을 할래야 할 수도 없다.

오랜만에 손님이 오니까 청소도 해야 하고 화요일 스터디에서 나눠 줄 번역도 해야 하고, 스터디 준비도 해야 한다. 음.. 무엇보다 소금을 사야 한다. (3년 전에 네팔에서 거머리 방지용으로 샀던 소금을 겨우 다 먹었다. 다른 곳에 소금이 떨어져 간다는 말을 쓰면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라고 했더니 혹자는 소금에 대해 쓴 걸로 이해하던데, 나는 거머리를 말하는 거였다. 거머리도 태어났으면 살아야지. 사람이랑 거머리 중에 누가 더 피 많이 빨아먹나 어디 한번 계산해 볼까.)

 

3월 28일 일요일, 레리에고스(reliegos)에서는 티로와 같이 다니던 날들과 다르게 8시에 숙소를 나왔다. 이 날부터는 혼자 걸어야 했다. 6km쯤 걸어서 다음 마을에 있는 까페에 들어갔다. 순례자들이 하나둘 까페로 들어와서 자리잡기 시작했다. 혼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아무도 내 옆에 오지 않았다. 당연히 티로가 와서 합류할 거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티로는 늘 숙소에서 맨 마지막으로 체크아웃 하기 때문에 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30분쯤 지나서 까페로 들어왔다. 주문을 하고 눈인사를 건네더니 다른 순례자들 옆에 가서 앉았다. 아, 정말 잔인했다.

남아 있던 빵을 급히 먹었다. 그래도 말 없이 나가면 다음에 만날 때 너무 어색할 것 같아서 식사를 끝내고 티로한테 가서 작별 인사를 했다. "몸 조심하고, 보게 되면 보자." 티로도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 리스트를 보면서 굵은 글씨로 쓰여 있는 레온(leon)까지 가기로 계획했다. 레리에고스에서 레온까지의 거리는 26km였다. 제대로 만난 적도 없으니 이별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고, 곧 또 다시 보게 될 거라서 티로와의 일을 더이상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걷는 일에 집중했다. 이 날은 순례자들의 무덤을 여러 개 보았다.

무덤도 필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잠든 듯이 누웠다가 새들과 짐승들의 먹이가 되고 흙이 되고 거름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꼭 누가 기억해줘야 맛인가. 그 기억이라는 것, 몇 년이나 간다고.

 

"만실라에서 레온까지, 쉽고 싼 택시를 타세요." 라고 써 있는 광고판. 쉽고 싼 유혹에 빠지기에는 그간 걸은 20여 일이 너무 아깝지.

 

원래 속도보다 느리게 가지도 빨리 가지도 않았는데, 순례자들은 하루 종일 눈에 띄지 않았다. 그냥 풀, 바람, 강, 나무, 하늘, 먼저 간 죽은 이를 벗삼아 걸었다.

생각해 보면, 내 속도는 누군가 옆에서 동행하기에는 지나치게 불규칙적인 것이 사실이다. 티로 말대로 에너지가 일정하지가 않아서 그런 건지, 빨리 갈 때와 늦게 갈 때의 편차가 너무 심하다. 어떨 때는 빨리 오래 걸으면서도 지치지 않고, 어떨 때는 천천히 조금만 걸어도 지쳐 버리기 때문에 아무도, 나조차도 그 날의 내 패턴을 예측할 수가 없다.

티로는 내 걷는 속도를 가지고 에너지 불균형을 지적한 건 아니었다. 나는 말할 때 익숙한 부분은 지나치게 빨리 말해서 사람들이 따라가기 힘들게 하다가 모르는 단어를 말해야 할 때는 급브레이크를 밟듯이 갑자기 멈춘다고 했다. 빠른 화살처럼 공중으로 쏴 대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중간중간 말이 툭 끊어질 때마다 듣는 사람들도 숨을 멎고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 불편하다고 했다. 듣는 사람 입장을 좀 생각해서, 문장을 속으로 먼저 만든 다음에 천천히 말하라고 늘 핀잔을 들었다.

 

"나는 너처럼 계획적인 인간이 아니라서. 너나 충분히 생각하고 말하세요." 그때나 지금이나 참 뒷일 생각 안한다.

 

 

 

 

레온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였다. 걷기 시작한 지 8시간 만이었다. 레온도 부르고스처럼 큰 도시였다. 혹시나 지나가는 순례자를 만날 수 있을까 해서 레온 입구에 있는 중국집에 들어갔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산티아고까지는 310km. 20km씩 천천히 걷는다고 해도 15일이면 족한 거리다. 중국집에 앉아서 다시 남은 날들을 계산했다.

체력이 몰라 보게 좋아진 것을 느꼈다. 몸무게를 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졌다.

식당을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주머니에서 툭, 하고 럭키스트라이크가 떨어졌다. 티로와 같이 피던 담배였고, 전날 분명히 티로가 챙겼던 거였다. 아까 아침을 먹은 식당에서 잠깐 둘이 이야기를 나눌 때 티로가 슬쩍 주머니에 넣어 준 것이 분명했다.

"이런, fuck!" 입에서 나도 모르게 영어 쌍욕이 튀어 나왔다.

 

까미노를 따라 숙소를 찾아 갔다.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오래된 숙소는 굉장히 넓었다. 산티아고에 가까이 갈수록 각지에서 모여드는 사람들로 알베르게는 붐볐다. 그 곳에서 샤나, 엘렌, 디니, 애니, 로, 마르코를 만났다. 그간 티로랑 다니면서 한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서로 안부를 주고 받았다. 서로 아는 순례자들의 이름을 대면서 잘 있나 확인하기도 했다. 나는 전날까지 티로와 같이 있었으며,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해 주었다. 혹시 누군가 업데이트를 해 주기를 바랬는데, 그 날 아무도 티로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밤이 되자 사람들이 숙소 밖으로 뛰쳐 나가기 시작했다. 천주교 전통을 알 리 없는 나는 영문을 몰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다가오는 부활절 관련 행사가 곧 있을 거라고 했다. 다른 순례자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더니 이상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길에 가득했고, 그 사람들을 구경 나온 인파들로 거리는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티로가 옆에 없는 것이 아쉬웠다. 잔소리도 그리워졌다.

내가 "까미노 아끼?" 하면서 현지인한테 물을 때마다 티로는 치를 떨며 제발 "돈데 에스따 엘 까미노?" 라고 문장 전체를 말하라고 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내가 그렇게 문장으로 말하면 상대편이 내가 스페인말을 잘 하는 줄 알고 훨씬 더 길게 말할 텐데 그럼 어떡하냐고 되물었다. 티로는 어이 없어 하며, 게을러서 노력하지 않는 거면서 다른 이유를 댄다고 나무랐다. 나는 지지 않고 다시 되받아쳤다. "뭐, 이유? 이유랍시고 맨날 변명만 늘어놓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보고 싶다.

 

우리 숙소 옆 건물에서 꺼먼 옷을 입은 사람들이 끝도 없이 나왔다. 솔직히 별 재미가 없어서 레온 시내에 있는 pc방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늦게 숙소에 들어가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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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빌, 뭐가 이렇게 써도써도 끝이 없는 건가. 너무 지루하고 너무 힘들고 너무 마음이 아프다. 어쨌거나.

 

3월 27일 토요일 아침, 한 침대에서 눈을 뜬 우리는 각자의 계획과 생각을 나누었다. 티로는, 진작부터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길에서 순진한 동양 여자 꼬셔서 볼일 다보고 버린 나쁜 남자라는 오해를 받기는 싫어서, 그리고 우리를 아는 순례자들이 나를 버림 받은 여자라고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도 싫어서 며칠을 더 함께 동행하면서 충격 없이 서서히 잘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물었다. 그게 오해가 아니라면 우리가 이해해야 할 너의 진심은 무엇이냐며. 그는 동양 여자가 아무래도 자기한테 맞는 것 같아서 동양 여자를 만나면 좀더 깊이 알고 싶어진다고 했다.

창밖은 이미 훤하게 밝았는데, 우리는 커튼을 꼭꼭 드리운 채로 '그럼 이번이 마지막' 이라며 다시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날 만난 그 어린 중국인 대학생한테도 그렇게 간 쓸개 다 빼줄 듯 친절하게 굴었냐며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시비를 걸었다. 그때까지 나를 껴안고 입을 맞추던 티로는 더 나빴다. 전날 만난 여학생 이름은 팡량이었는데,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로 하던 일을 계속 하면서 "팡량, 팡량, 오오, 내 팡량!" 하고 그 여학생의 이름을 불러 댔다. 살다살다 그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나는 카르마고 뭐고, 갑자기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씻고 배낭을 정리하면서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며칠 더 같이 안 걸어 줘도 될 것 같아. 그냥 오늘 헤어지자." 티로는 정말 그래도 괜찮겠냐며 물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그는 마지막 순간을 매번 너무 힘들어 한다고 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다른 일을 하면서 그 순간을 직면하는 것을 최대한 늦추다가 막판에 쫓기듯이 떠나거나 떠나보내는 방법을 주로 쓴다고 했다. 늑장을 부리다가 기차 시간에 쫓겨서 미친 듯이 달려가 버리거나, 뒤돌아보지 않기로 하고 서로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가거나 뭐 등등 무 자르듯이 단칼에.

 

썰렁하던 분위기는 어이 없는 작은 사건들 때문에 다시 확 피어올랐다.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차마 말을 못하겠고, 다른 하나는 침대가.. 침대 밑에서 침대를 지지해주던 막대기가 부러진 거였다. 정말 한참을 눈물을 흘리면서 웃은 끝에 나는 그냥 모른 체하고 나가자고 했고, 티로는 말을 하고 가는 게 예의라고 해서 다시 마지막으로 '진지한 토론' 모드로 돌입했다. 리셉션에는 어제의 남미 여자가 있었고 티로는 "아침에 보니 이게 떨어졌길래. 배상을 해야 할까요?" 하면서 최대한 건조하게 상황을 정리했고, 여자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냥 가라고 했다. 나는 좀 부끄러웠는데, 티로는 "걱정마. 남미에서 왔다잖아. 우리보다 더 과격하면 과격하지 덜하지는 않을 걸." 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숙소에서 나와서 마지막으로 아침을 함께 먹기 위해 까페로 갔다. 빵과 커피를 먹으면서 나눈 대화들은 무미건조하거나 서로를 자극하는 말들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종교 얘기가 나왔을 때 티로는 "한동안 가톨릭이었는데, 내가 교회를 떠났지." 하고 말했고 나는 빈정거리면서 "교회가 너를 떠난 거겠지." 하고 받았다.

이윽고 티로가 말했다. "내가 먼저 나갈까, 니가 먼저 나갈래?" 나는 남겨지는 것보다는 남기고 가는 게 마음이 덜 상할 것 같아서 내가 먼저 가겠다고 했다. 혼자 남겨진 사람 입장을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다. 티로는 한두 시간쯤 더 앉아 있다가 나가겠노라고 했다.

사하군의 까페를 나와서 걷기 시작한 건 아침 9시 30분이었다. 알렉스도 없고 티로도 없고 다른 아는 순례자도 없이, 나는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길 위에 서게 됐다. 조금만 살짝 건드리면 기다렸다는 듯이 눈물을 철철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사하군을 빠져나오려고 하는데 아침 장이 서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냥 지나갔을 테지만, 티로가 빙의를 한 모양인지 혼잣말로 "interesting." 하고 중얼거리며 장을 구경했다.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지가 않았다.

 

 

 

여느 때와 비슷한 날씨, 여느 때와 비슷한 풍경 속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순례자들을 만나게 되더라도 경계를 하게 되는 폼이, 처음 길 위에 섰을 때처럼 의심 많고 상처 많은 겁장이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 생각 안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 사하군을 벗어나 내달렸다.

 

산티아고까지 고작 315km 남았을 뿐인데. 헤어진 그날부터 매일 같이 있는다고 해도 15일이면 끝날 것을. 참 모질게 이성적인 인간이었다. 그렇지만, 매일 커버하는 거리가 비슷하고 취향도 비슷하니까 남은 날들 중 못해도 다섯 번은 더 볼 수 있을 걸로 생각했었기 때문에 솔직히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곧 또 볼 건데 뭐.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손바닥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라고 생각했다.

 

 

길에서 본, 또다른 순례자의 무덤. 나는 어느 길을 떠돌다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될까.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선배 순례자들처럼 숨이 끊어진 그 자리에 그대로 묻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들의 뜻이 아니라 순례자의 뜻을 따라 유해를 고국의 선산으로 모셔가지 않고 길 옆에 무덤을 만들기로 결정한 유족들도 존경스러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그 사람다울 수 있게 두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에 나오는 마을에서 오랜만에 엘렌, 디니 모녀와 또다른 남자 순례자를 만났다. 까페에서 음료수를 사서 함께 길가에 앉아서 마시게 되었는데, 그렇게 느껴서 그랬는지 분위기가 묘했다. 한동안 무리와 떨어져 있었던 탓에 그들은 그들대로 이미 그룹을 만들었고, 같이 나눌 이야기가 없었던 나는 어색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뭔가 달라져 있었다.

 

티로와 만난 이래 열흘 간, 혼타나스(hontanas)로 34km 걸은 것 외에는 줄곧 20km 남짓밖에 전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거리를 벌리려고 정말 미친 듯이 앞만 보고 걸었다. 내가 먼저 도착해서 짐을 푼 마을을 티로가 지나가게 될까봐 무서웠다. 알베르게 앞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있을 때 묵묵히 지나쳐 가는 티로를 보는 것을 상상하는 일은 괴로웠다. 

6시간 동안 31km를 걸어서 3시 반 쯤에 도착한 곳은 레리에고스(reliegos)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평소 시속 3km로 움직이던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내달린 셈이었다, 다음 마을은 6km나 더 걸어가야 했는데, 다음 마을에서 티로가 결혼 반지를 들고 기다린다고 해도 더이상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을에서 묵을 수밖에 없었다. 전날 만난 미국인 부자와 중국인 여학생(팡량)도 같은 숙소로 왔다. 그들은 독일 친구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대답했다. 대답하는 표정이 스스로 생각해도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그들이 의아해 하길래 한마디 덧붙였다. "우린 그냥 친구야."

 

설마설마 했는데, 한 시간이 가고 두 시간이 가도 티로는 오지 않았다. 전 마을에 멈춘 것일까. 내가 좀 멀리 오긴 멀리 왔지. 괜히 멀리 왔나. 아니야. 이게 맞아. 혼란스러웠다.

전 마을에 멈춰 선 것이 분명하다고 느꼈을 때쯤, 그러니까 올 거면 진작에 왔어야 했고, 그 시간까지 안 왔다는 건 길이 엇갈린 게 분명한 시간 쯤, 그러니까 6시 반쯤 1층 리셉션에서 시끄럽고도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늘 모르는 사람들과 장황하고 시끄럽게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는 티로의 목소리였다. 여느 때나 다름 없이 장황스러웠다. 속이 뒤집혔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한동안 밑에서 떠들던 티로는 숙소가 있는 2층으로 올라왔다. 나를 보더니 놀라는 눈치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는 표정이었다. 나중에 들었는데, 티로도 내가 평소처럼 20km 이상 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으로 무리해서 한 마을을 더 걸었다고 했다. 직전 마을은 13km 전에 있었다. 걷다가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남은 거리를 절룩거리면서 오느라 늦었다고 했다.

얼마나 마주치는 게 부담스러웠으면 그랬을까. 우리의 재회를 보던 미국인 일행은 '친구라더니 거봐. 역시 아니잖아?'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리는 함께 숙소 옆에 있는 바로 갔다. 티로도 함께 왔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건 정말 불편했다.  

 

바보야. 미련한 인간아. 앞으로 다시는 안 마주쳐도 괜찮으니까 다치지 마라. 나도 내 갈 길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너도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완주하도록 해라.  

 

2013년 3월 29일, 그러니까 어제 나는 좀 말이 통하는 편인 전직 거래처 인간을 만났다. 그의 주선으로 정신보건법 관련 레포트를 써야 하는 예비 변호사와 인터뷰를 하게 됐다. 전직 거래처 인간은, 예비 변호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게 설명을 너무 빨리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시야가 급격히 좁아지는 병에 걸려서 청력도 같이 나빠진 관계로 말을 너무 빨리 하면 못알아 듣는다는 거였다.

보기에는 멀쩡해 보여서 나는 자꾸만 말을 빨리 했다. 2차를 끝내고 헤어질 때에야 그가 조심스럽게 더듬으면서 한 발씩 떼는 것을 보았고,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도근시인 나와 달리, 그는 확보할 수 있는 시야가 3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책을 읽을 때 다다음 줄로 넘어가거나 읽었던 줄을 다시 읽는 게 다반사라고 한다.
나는 까미노를 끝내고 나중에 나중에 사라고사에서 만났던 한 브라질 의사가 생각났다. 그 여자도 비슷한 병이었던 것 같은데, 회전문도 잘 통과하지 못했다.

나는 갑자기 슬퍼졌다. 360도를 다 보기는 보지만 맨눈으로는 코앞에 있는 거울에 비친 지 얼굴도 안 보이는 병신과, 또렷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길고 가는 빨대를 통해서만 세상을 볼 수 있는 병신이 기구한 인연으로 만나게 된 셈이다. 여행을 한답시고 길로 나선 장님과 앉은뱅이 2인조를 보는 것처럼 처연했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그냥 드러내 보였을 뿐이었다. 그랬을 뿐인데 아픔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그 느낌은 뭐였을까. 

 

우리는 다들 아프다. 움푹 패이고 부러지고 곪아 터졌고 피 흘리지만, 기꺼이 서로의 눈이 되고 손이 되고 발이 되고 어깨가 되면서 함께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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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에 시작됐던 나의 까미노 1기는, 든든한 보살핌과 소소한 간섭을 패키지로 제공하는 알렉스의 보호 아래 모든 예측불가능성이 선한 의지에 의해 차단된 채 보낸 열흘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그는 나를 위해 헌신했지만 나는 그 덕분에 안전하기도 했고 길로부터, 사람으로부터 고립되기도 했다는 말이다.

나는 충분히 안전했다. 스페인인인 그가 말하는 대로만 하면, 것도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로컬 주민들 눈살 찌푸리게 할 일도 없었고, 그래서 곤란한 상황에 빠질 일도 없었다. 한마디로 그는 친절하고 보수적이며 자상하고 엄한 아버지였다.

 

알렉스와는 열흘 정도 동행했었던 것 같다. 누구도 계획하지 않았지만, 3월 17일의 산토도밍고 이후로 나는 까미노 2기로 접어들었었고, 3월 25일에 길에서 폭우 세례를 받으면서 티로와 함께 걷던 2기도 대략 끝나가고 있었다.

 

3월 26일, 칼자딜라 데 라 쿠에자(calzadilla de la cueza)의 알베르게를 떠날 때, 나와 티로는 나름 쿨한 척 했다. 피차 함께 할 수 있는 미래가 없는 마당에, 더이상 바랄 것도 없었고 그래서 서로 요구할 것도 없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났고, 함께 하기에는 우리는 서로 너무나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칼자딜라 데 라 쿠에자를 떠나면서 다음에 만날 마을을 지정하지 않았다. 같이 있기 위해서 피차 속도를 조정하지 말고, 서로 다른 속도를 인정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거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 날 알베르게를 나오면서 공식적으로 헤어진 것과 다름 없었다.

전날의 폭우 세례를 받으면서 그간 내게 일어났던 평생의 모든 일들이 내 뜻과 관계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던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 또한 하늘이 알아서 보여 줄 거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지난 사진들을 보면서 사건을 유추하지 않고 그날의 기억 만으로 이렇게 말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면, 3년 전의 진심이 순간의 짧은 감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제, 그 날의 사진들을 보면서 매일 조금씩 옅어지고 있는 생각을 끌어 모으자면 다음과 같다. 아래는 아침의 사진이다. 전날과 비슷하게 흉흉하다. 물론 전날 구름은 검은 색에 더 가까왔다.

 

날씨는 계속 꾸물꾸물했다. 혼자 걷는 길은 스산하고 지루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티로랑 함께 걷는 날은 사진을 많이 찍을 수가 없었다.  2010년 3월 26일 금요일을 기록하는 사진은 참 많다.

이별을 예감했던 나는, 함께 했던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서 티로한테서 새롭게 배운 것, 티로가 자주 쓰는 말, 티로의 버릇 같은 것을 아침에 숙소에서 나오기 전에 수첩에 적었다. 명상, 침낭은 티로한테 배운 것, think, research, system, interesting, efficiency는 그가 종일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침낭은 땅에 죽 펴놓고 곱게 돌돌 말아서 전용 가방에 넣는 게 정석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조금씩 쑤셔 넣는게 시간도 적게 들고 침낭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한다.

우리는, 헤어지자니 서운하고 같이 가자니 점점 아파오는 길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따로 걸었다.

혼자 걷고 있는데 뒤에서 미국인 부녀와 친구, 그리고 그들과 함께 온 중국인 교환학생이 나를 앞질러 갔다. 인상착의를 말하며 티로를 보았느냐고 하니 뒤에서 따라 오고 있다고 했다. 티로도 혹시 나를 봤냐고 물었다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위치를 확인하면서 같이 가는 것도 아니고 따로 가는 것도 아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하군(sahagun)에는 내가 먼저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들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속도를 늦추었다. 8시 반부터 걷기 시작해서 사하군에는 3시쯤 도착했는데 더 못갈 만큼 피곤했고, 티로도 거기서 멈춰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길 옆에 있는 알베르게를 볼 때마다 "내가 티로라면 저기서 묵을까?" 하고 생각했고, 한 곳을 골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다였다.

알베르게에는 남미에서 온 매력적인 여자가 호스피탈레로로 근무하고 있었다. 체크인하는 곳에서 오스트리아에서 왔다는 루디와 베아뜨를 처음 만났다.

내가 체크인한 알베르게는 주빈을 위한 호스텔과 나같은 순례자를 위한 숙소가 따로 있는 곳이었다. 호스텔에는 길에서 만난 미국인 일행이 체크인했다. 숙소에 들어가지 않고 미적거리면서 티로를 기다렸다. 30분쯤 지나서 티로가 알베르게로 들어왔다.

암묵적으로는 진작에 이별한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지 않았었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있는 곳으로 그가 온 것이 고맙고 신기했다. 숙소에는 방이 여러 개 있었다. 이미 진작에 비공식 연인 모드였던 우리였고, 그 때는 각자 갈 길이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된 우리였지만, 숙소 배정만큼은 우리 몫이 아니었다. 남미 여자는 척 한번 우리를 훑어보더니 원래 여자 방 남자 방이 따로 있는데 요즘은 손님이 적으니 둘이 그냥 같은 방을 쓰라고 했다. 난처한 듯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지만 티로는 "뭐, 그럼 할 수 없지." 하며 안내하는 여자를 따라 숙소로 들어갔다.

그래서 우리는 적은 돈에 화장실까지 딸린 2인용 침실에 묵게 되었다. 것도, 침대 여러 개 중에 두 개를 점유한 게 아니고 침대가 딱 두 개 있는 방으로 인도되었다. 

 

아래 사진은 묵었던 알베르게의 입구. 매점 겸 리셉션이다. 그 아래는 오스트리아에서 왔다는 루디.

 

우리는 어색한 가운데 짐을 풀고 밖으로 나갔다. 술집에 가서 먹고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동안 어색함이 좀 사라졌다. 열 두시가 넘어서 알베르게에 갔더니 문이 잠겨 있었다. 불 켜진 방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근무하는 사람은 다 퇴근한 것 같았고 순례자들은 다 잠이 든 것 같았다. 티로는 나에게 담을 넘어 가서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니가 넘어가서 니가 문 열어." 라고 했더니 자기는 덩치도 크고 남자라서 혹시 누가 보면 도둑으로 오해할 수 있으니 내가 담을 넘는 게 맞다는 거였다. 담을 넘어 간 다음에 나는 바로 문을 열어주지 않고 장난을 쳤다. 한참을 웃다가 같이 숙소로 들어갔다. 술기운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으나 우주가 만들어 준 기회로 인해, 우리는 그날 세 번째로 함께 잠을 잤다. 위험을 무릅쓴 채로. 왜냐하면, 우리가 잠든 방은 문을 잠글 수 없게 돼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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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3 25일 목요일은 내 인생에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 중 하나다. 이날, 나는 벼락을 맞은 거나 다름 없다. 그 날 이후, 이전의 나는 죽고 완전히 새로운 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잘 된 일인지 잘못 된 일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남은 인생을 통틀어서 이 날 하루와 바꾸자고 해도 바꿀 수 있을 만큼 이 날의 경험은 찬란했다.

 

전날 나와 티로는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의 술집이 문을 닫는다고 나가 달라고 할 때까지 시시덕거리면서 놀았다온 우주가 협동해서 자기를 물 먹이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지금껏 꿋꿋이 살아남았다며, 그건 다 IQ 141의 뛰어난 지능 때문이라고 티로는 뻐겼다. 나는 나대로, 나를 만난 자는 누구나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만큼 매력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 똑똑하고 잘난 너마저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고나 또한 만 3세가 되기 전에 한글을 깨쳤으며공인 IQ는 비록 110이지만 문제를 풀다 풀다 재미가 없어서 중간에 포기한 결과 그렇게 된 거라고 되지도 않은 말들을 주워 섬기면서 떠들어댔다.

언젠가 세상에 나가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겠다는 티로의 말을 듣고는 목청이 찢어질 만큼 크게 웃으면서 "야 이 덜 떨어진 인간아. 구원하는 사람 수가 뭐가 중요하냐. 한 명이라도 제대로 구원해라. , 바로 너 말이야." 하고 말했고, 그 말을 듣은 티로도 다시 크게 웃었다

한동안 우리는 둘다 너무 extremely smart 하고 우리는 너무 extremely funny 하며우리는 너무 extremely loving giving 하다며 자화자찬에 열을 올리다가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똑똑해도 너무 똑똑한 나머지 이 지경에 이르렀다며, "Homo extreme sapiens"라는 신조어를 함께 만들었다.

그날 밤, 까미노의 절반 가량을 걸어 온 우리는 스스로에게 대만족해서 흥분이 극도에 이른 것이었다

 

다음날 숙소를 나선 시간은 오후 1시로 기록돼 있다. 알베르게는 그렇게 늦게까지 있을 수 없다. 아침 9, 아무리 늦잠을 자도 아무리 아파도 10시에는 체크아웃을 해야 한다.(알베르게는 1박만 가능하다.) 정황상 호스텔에서 잔 게 분명하다. 이틀 간의 외도로 우리는 사실상 몹시도 친밀해졌지만, 딱 그만큼의 긴장감으로 분위기는 무거웠다거기서 더 친해지면남은 날을 떨어져서 보내는 것이 힘들어질 거라는 것을 Homo extreme sapiens인 우리는 둘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며칠간 계속 하루에도 몇번씩 날씨가 변덕을 부렸다이날 길을 나설 때도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는 455km. 하루에 20km씩 걸으면 22일 남짓, 25km씩 걸으면 18일 남짓이 걸리게 된다남은 거리와 예상 소요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한 건 정확히 이 날부터였다.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불고 있었기 때문에 티로는 방풍과 보온을 위해 우비를 입고 앞서 갔다. 이날 우리는 다음 마을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 따로 걸었다둘이 같이 걷다가 안면 있는 순례자들을 만나면 뭔가 눈치챌 것 같은 생각이 은연 중에 피어 올라서 우리는 둘다 그 생각에 감염되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걷는 속도를 달리 했다....

 

일단 여기까지. 명색이 M.M인데 성목요일에는 나가서 만찬장에 있어 줘야지기회 되면 다시 잇기로 한다. 지금 시간은 2013 3 28일 저녁 7 20.

 

 

2013 3 29일 아침 8, 이어쓰기.

이 날 우리는 1시부터 7시까지 6시간 동안 17km를 걸었다유난히 날씨 변화가 많았던 날이다. 쨍하게 맑았다가 금방 비가 왔다가, 다시 쨍하게 맑았다가 비가 퍼붓기를 수 차례. 여러 사진에서 보다시피, 까미노는 10km 이상 덜렁 길만 이어지고 집도 가게도 비 피하는 곳도 없는 허허벌판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폭우가 쏟아진다고 그만 걷거나 비를 피했다가 다시 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아침에는 무조건 알베르게에서 나와야 했고, 일단 길 위에 올라 서면 기어가든 굴러가든 다음 마을까지는 가야만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몇 시간 동안 차도 사람도 만날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좀전까지 비가 왔다가 금방 다시 맑게 갠 하늘 아래로 곧게 뻗은 흙길을 천천히 가고 있을 때였다. 서남쪽 하늘에서 어마어마하게 크고 시커먼 먹구름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내가 있는 쪽으로 달려 들고 있었다. 실생활에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세상이 끝나는 날 악마의 군단이 검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땅으로 무자비한 속도로 치고 내려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전히 눈부시게 파랗기만 하던 나머지 하늘 90%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심상치 않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봐 왔던 수많은 먹구름 중에 그렇게 시커먼 건 정말로 처음이었다. 오던 길을 뒤로 돌아 전속력으로 달려도 비구름을 피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길 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내 머리 위에 먼저 도착한 구름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하늘의 나머지 반은 여전히 파란 상태였다. 굵고 거센 비는 너무 아팠다.

그건 시작이었다. 양동이에 가득 든 물을 쏟아 내는 건 저리 가라였다. 하늘 전체가 소방 호스가 된 것처럼 하늘은 엄청난 양의 비를 무시무시한 힘으로 뿜어냈다. 눈을 뜰 수도 없을 만큼 비가 퍼부어대는 바람에 나는 걷기를 포기하고 길 위에 멈춰 섰다 10분 만에 파랗던 하늘 전체가 먹구름에 점령 당했다주변의 풀과 나무모든 것들은 비바람에 흔들리고 쓰러지면서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나도 무서워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20분쯤 됐을 때가 절정이었던 것 같다온몸이 덜덜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히기 시작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 뭐 이런 생각을 하며 서 있었는데, 다른 건 다 지나가도 이 비는 기세로 보아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 같았다언제까지 이렇게 하염 없이 온몸으로 이 비를 맞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길 위에 선 후 한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무력감이 격하게 올라왔다. 무섭고 떨렸다. 이대로 꼼짝 없이 여기서 죽나 싶었을 때, 빗줄기가 아주 조금 약해진 것이 느껴졌다. 실눈을 뜨고 하늘을 살폈다서남쪽 하늘 끝자락 너머로 하늘색이 손톱 조각만큼 올라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먹구름은 덮칠 때와 같은 빠른 속도로 동북쪽을 향해 물러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저 멀리서 파란색 하늘이 광속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리워 있던 태양은 구름 그림자들 사이사이로 빛을 보내고 있었다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먹구름이 파란 하늘을 덮고 폭우를 뿌려대다가 다시 파란 하늘에 자리를 내 주는 데까지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빗방을이 내 머리 뒤편 동북쪽 땅에 떨어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 나는 길 위에 뿌리 내린 나무처럼 서 있었다. 판타지 영화가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 것만 같이 아찔한 광경이었다눈으로, 코로, 입으로, 귀로, 온몸으로 쏟아지던 비를 직접 보고 듣고 삼키고 만졌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꿈에서 방금 깬 것처럼 상황이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곧이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비맞은 강아지가 온몸을 흔들어서 몸에 묻은 비를 털어내는 것처럼, 나는 몸을 부르르 떨고 나서 무턱대고 하늘을 향해 물었다.

"제가 방금 본 이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누가, 이런 것을 보게 하신 겁니까?"

물론, 하늘이 고분고분 내가 알아듣는 말로 대답해 주었을 리가 없다. 하늘이 아래 사진처럼 되었을 때,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성전에 참배하러 간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면서몇일 전에 까미노와 기차를 비교했던 것이 생각났다. 어쩌면까미노는 기차보다는 우리 일생과 더 비슷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때 문득 들었다. 태어나는 곳은 출발한 마을, 삶의 목표는 산티아고,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까미노 위에 선 순례자앞서간 사람들과 뒤에 올 모든 사람들 중 내가 현세에서 만난 사람은 하늘이 정해준 인연으로 비슷한 시기에 출발해서 까미노 위에서 만나게 된 순례자화살표는 목적지를 정하고 길을 떠난 사람을 위해 앞서간 모든 존재들이 준비해 둔 계시비구름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구름 뒤에 있는 파란 하늘과 해와 별과 달은... 그리고 이 모든 것은.. , 아아. 아아아

 

배낭을 메고 까미노 위에 서 있는 사람만 순례자가 아니다. 길을 걸을 때에만 살아 있음의 신비를 실감하고 경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길 위에서만 우주의 존재들이 온몸으로 전하는 찬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까미노가 끝나면 돌아가야만 하는 그 곳에서 일어나는 일상이 진짜 여행이다.

길 위에서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에서는 길을 그리워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길을 가다 멈춘 곳이 그 날의 집이고, 집을 나선 모든 사람은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길 위에 선 순례자다아스팔트를 걷건 산길을 걷건 사무실 안의 모노륨 위를 걷건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눈에 보이는 모든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 알고 있는 모든 것과 알지 못하는 모든 것, 지나온 모든 것과 앞으로 올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티로와 약속한 칼자딜라 데 라 쿠에자(calzadila de la cueza)에 도착했을 때, 티로는 마을 입구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나는 내가 느낀 것을 티로도 느꼈는지 궁금해서 물었다티로는 언제 그칠지 모르는 폭우 속에 가만히 서 있다가는 체온이 떨어지고 기운에 압도 당해서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며,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좀 시시했다.

 

우리는 따로 확인하지 않아도 마음이 잘 맞았다. 이 날은 알베르게에서 묵기로 했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아는 순례자 몇몇이 마을에 있었다오랜만에 진도 만났다엄청난 경험 때문에 흥분해서 옆 테이블 사람이 먹다 남긴 와인까지 가져 와서 마셔 대는 내게티로는 그만 마시라고 두어 차례 경고했다진은 둘이 투닥거리는 것이 마치 오래 같이 산 부부 같은 느낌이 난다고 했다. 나중에 티로도 그 말에 동의했다.

식당의 젊은 웨이터는 너무 귀여웠다. 내가 너무 귀엽게 생겼다며 좋아하니까 티로가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보란 듯이 뱀이 나무를 친친 감는 것처럼 청년을 안았다. 기대한 반응은 없었다

 

3 25, 18일차의 여행은 그렇게 끝났다.


Posted by 微物의 숨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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